(장애인인식개선신문=최봉혁기자)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수상작 연재] 대상 김민주 - ⑦ 아틀라스의 윤리 아틀라스의 윤리 27 하늘이 세피아의 짙은 암갈색으로 채색돼 있었다. 오징어 먹물에 물을 섞어 바른다면 딱 저 색깔이 되겠지. 은하수를 따라 탁한 흙탕물이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고자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담배에 불이 붙지 않았다. 빗물이 침윤된 젖은 담배처럼 쓸모가 없었다. 상인아, 상인아….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돌아봐도 아무도 없었다. 상인아, 상인아…, 여기야…. 분명 누군가가 멀리서 날 부르고 있었다. 누구야?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상인아, 상인아…. 그는 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누구냐고! 나야…. 네가 누군데! 그는 대답 대신 슬며시 옅은 미소를 띠는 듯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짓하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오라고? 그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손짓만 반복했다. 그쪽으로 오라고? 아니면 뒤로 물러서라고? 우리는 백 발자국 정도를 사이에 두고서 말을 주고받았다. 꽤 먼 거리였지만 신기하게도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듯했다. 야! 너 누구냐고! 대답을 해야 알 게 아냐! 그러자 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다. 오히려 더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얼굴이 없었다. 얼굴은 있었지만, 그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암갈색 하늘이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입체감 없는 그의 얼굴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다. 그는 발갛게 상기된 듯 그냥 붉었다.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쉬지 않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하지만 자기 있는 쪽으로 오라는 것인지, 아니면 뒤로 더 물러서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옆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그들 모두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거기 있는 그 사람들은 누구니? 우리? 응…. 나랑 같은 사람들. 그는 행복해 보였다.
28 나는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옷을 입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크로스백을 맨 어깨에는 벌써 피로감이 몰려왔다. 만날 씹는 토스트를 또 우걱우걱 입으로 가져갔다. 골목골목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떠밀려 나왔다. 인간은 다리부터 잠이 깬다. 아직 축축한 머리에 퉁퉁 부은 눈두덩이, 몽롱한 눈빛…. 누가 봐도 잠이 덜 깬 사람들 같았다. 나도 똑같은 모습으로 그들과 마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리만큼은 바삐 걸으며 우리를 이끌어 주었다. 모든 게 정해진 시간에 맞춰 진행됐다. 나의 습관은 자연보다 정확했다. 계절에 따라 아침 해는 늦게 나와도 된다. 사장님 같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기계처럼 항상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골목을 돌아 늘 건너는 횡단보도 앞에 선다. 옆에서 첫 담배를 빠는 아저씨도 항상 그렇다. 이 시간의 지하철 역사를 걸을 때마다 난 소속감을 느낀다. 무뚝뚝한 표정이 생김새가 되어버린 아저씨, 아침부터 뭐가 그리 불쾌한지 아무나 밀치고 가는 할머니, 도도하고 거만하게 날 빠르게 훑어보는 예쁜 아가씨, 그 아가씨보다 더 당당해 보이는 더 예쁜 아가씨, 그 아가씨들이 곁눈질로 훔쳐보는 키 크고 잘생긴 남학생, 그 남학생을 잠시 슬프게 만드는 예쁜 여대생과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잠이 덜 깬 나. 우리를 묶어주는 공통분모는 전혀 없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이동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일렬 위에 있다. 맨 앞의 누군가가 걸음을 재촉하면 뒷사람은 더 빨리 걷고, 난 그들의 뒤통수와 발걸음을 보며 달린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전달해준다. 나는 무한궤도 위에 있다. 레일은 바퀴를 감으며 직장까지 옮겨준다. 회사에 도착하면 궤도는 끝이 나고, 나는 폭포수처럼 레일에서 떨어진다. 레일은 저녁이 되면 역방향으로 움직여줄 것이다. 레일 위의 사람들은 행복하다. 궤도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 내가 출근하지 않고 피시방을 간다한들 붙잡으러 올 사람도 없다. 머리 위에 쭉 늘어선 cctv도 내가 엉뚱한 짓만 하지 않으면 내게 무관심할 것이다. 빗장은 풀려있다. 초병은 없다. 나는 정해진 출근 코스에서 이탈해도 된다. 뛰쳐나가도 상관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강하다. 나는 고등학교 자습실에서 이 단순한 진실을 배우지 않았던가. 보이지 않는 선생들로 꽉 차 있던 그 거대한 감시를 이미 체감하지 않았던가. 중력에 노출된 사과는 늘 같은 방향으로 떨어진다. 나에게도 정해진 방향이 있을 뿐이다. 빗장 풀린 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 그것은 자퇴를 의미했다. 지금은 무엇을 뜻할까. 사실 달리 갈 곳도 없지 않은가. 만족하고 산다는 것은 대안 없는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29 “반갑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반갑다면 그런 줄 알겠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런 인사말처럼 가식적인 게 또 있을까. 잘 부탁드린다는 사람치고 정말 나에게 부탁해야 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내가 부탁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비뚤어졌을까. 언제부턴가 난 삐딱한 시선으로 모든 걸 대하기 시작했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럼 난 원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됐습니다.” 새로 온 부장은 아주 점잖아 보였다. 그 점에서는 예전 부장과 다를 바 없었다. 중년 남성이라면 누구나 입을 법한 평범한 정장에, 전혀 튀지 않는 넥타이에, 세상의 모든 부장이 탄 가르마가 그에게도 보인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나이에 비해 머리숱이 많지도, 아주 적지도 않았는데 이 점까지도 그를 아주 무미건조하게 보이게 했다. 여하간 특이함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는 점만이 그의 개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딴 게 나랑 무슨 상관일까. 그는 진리대학교 신방과 출신이라는데…. 나요한도 거길 졸업했지…. 지난 반 년 동안 비비 꼬아둔 덕분에 결코 풀리지 않을 동아줄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정말 풀리지 않았다. 다만 끊어졌을 뿐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변 부장의 요한복음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는 거듭났고, 기분 좋게 떠났다. “자네가 한상인 기자인가?” 새로 온 부장이 날 불렀다. “…네.” 왜 ‘부장님’이라는 말을 생략했을까. 옛 부장에 대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라도 지키고 싶었던 걸까. 그럴 리가…. 그냥, ‘부장님’이라는 말에 조금 싫증이 난 것이겠지. “변 부장님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 나는 손 안의 라이터다. 힘이 있는 자는 나를 쥐락펴락 할 수 있다. 쪼였다가 풀어줬다가, 아프게 했다가 느슨하게 놓아준다. 가스가 다 떨어지면 버리겠지. 난 손에 꼭 쥐여진 일회용 라이터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식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걸까. 어째서 느슨하게 풀어주지. 날 떠보는 것일까. 젠장! 그는 진심으로 날 칭찬하고,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대체 내가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어째서 모든 걸 의심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이느냔 말이다. 사소한 모든 것에도 많은 것을 염려하고 생각해야 하는 시시각각이 짜증스럽게 피곤하다. 숨을 쉴 때마다 무거운 공기를 들이마신다면 딱 이런 기분일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뭘….” ‘자네’ 칭찬에 그리 열을 올리던 변 부장인지, 똥 부장인지 하는 작자는 칭찬만 남기고 떠났다. 하긴 칭찬할 만하지. 백만 원씩 받으며 머슴처럼 일했는데! 이것저것 다 떼면 80만 원이 조금 넘는다. 이 돈은 한 달 치 양식이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백수가 되어 있다면 그때의 생활비도 포함된 액수다. 마당쇠도 한 달 내내 쌀가마니를 나르고서 이 정도 세경을 받는다면 민란의 수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당쇠는 좋겠다! 숙식제공이니까. 혹시 내 월급의 비밀은 반올림의 역사에 연유하는 건 아닐까? 4 이하는 버리고, 5 이상은 올리는 게 가하다 사료 되옵니다, 각하! 사사오입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마 우리 사장은 이렇게 계산했겠지. 인턴에게 100만 원만 준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다고 150만 원은 너무 많다. 140만 원이 적절하겠다. 하지만 사사오입이므로 4 이하는 버리자. 결론은 100만 원이군. 저기, 시급으로 따지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데요! 용감한 나요한이 따졌었다. 여긴 봉급제라서 그래. 누군가 ‘합법적’으로 답했었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친구도 나보단 많이 받는다. 2012년 기준 4580원. 너 얼마 받고 다녀? 스스로 백수라 칭하던 친구가 물었다. 100만 원. 뭐? 100만원. 뭐? 100만 원. 그래? 응. 고작 미래신문에서 무려 월 100만 원을 준단 말이야? 이런 바보야, 말이 바뀌었잖아. 무려 미래신문에서 고작 월 100만 원이겠지. 하하! 그래, 그런데 너 시급으로 계산하면 나보다 적다?
“자네 기사는 잘 봤네. 특히 그… 뭐더라? 그… 샹송빌딩에서 투신자살한 사건….” “…네.” “그 자살한 사람이 공무원 수험생이랬지?” “…네.” “공무원 시험이 이제 두 달 정도 남았다던데….” “…네.” 부장이 날 힐끗 봤다. “힘든가?” 그가 내 속내를 짚고 있는 것 같아 뜨끔했다. 나는 재빠르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나는 기분 좋게 웃어보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마에 전광판을 붙이고 다닐 수 있다면, 형형색색으로 저 글씨를 밝혔을 것이다. “할 만한가?” “네, 할 만합니다!” 지낼 만한가? 중대장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이병 한상인은 그렇게 대답했다. 힘든 점은 없나? 중대장이 다시 물었었다. 없습니다! 정말 없나? 중대장은 재차 물었다. 정말 없습니다! 중대장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도 나는 일병에게 맞아야 했다. “바쁜가?” “네, 오늘 나 기자랑 채용설명회 취재를 좀…….” “그래? 그럼 그거 끝나고 말이야, 원래 인턴에게는 이런 일 할당 안 하는데 말이지….” “…….” “몇 해 전부터 공무원 시험 열기가 장난이 아니라더군. 참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지? 몇 푼 되지도 않는 월급 받으려고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어야 하다니… 맞지?”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네,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면 앞서 했던 내 말을 스스로 뒤집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아닙니다, 그래도 살 만합니다, 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부장의 말을 반박하는 꼴이 된다. 왜 이런 걸 묻는 거야! “심층기사 한번 써보지 그래.” “네?” “공무원 시험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대학가로 가든 노량진 수험가로 가든 수험생들 만나서 심층취재 한번 해보라고.” 간밤에 석민 학생의 꿈을 꾸었다. 그의 모호한 손짓이 다시 내 눈 앞에서 흔들거리는 듯하다. 부장은 지금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것인가, 저리 가라고 손짓하는 것인가. 인턴에게 심층취재라니…. 못할 것도 없다! 두 달 후에 새로 신입사원을 뽑는다. 하지만 기왕에 같이 일하던 사람을 쓰는 게 저들로서도 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겠다. 난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 성실한 자는 모든 것을 얻노라! 담임은 이렇게 말하였다.
30 나는 부장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요한도 비시시 웃고 있었다. 우리 둘 다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거렸다. 저 인간은 무슨 일로 기분이 좋은 걸까. 나요한이 웃으면 난 불안해진다. “뭐 좋은 일 있냐?” 내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나요한은 내가 사준 커피를 기분 좋게 마셨다. 저건 내가 나요한의 차를 얻어 타고 취재를 갈 때마다 내야 하는 요금이다. “새로 오신 부장님 우리 학교 신문사 동아리 88학번 선배시거든.” 순간 내 심장에서 피가 한꺼번에 몰려나오는 듯했다. 그 때문에 표정도 덩달아 찡그려졌다. 하지만 나요한이 눈치 채기 전에 얼굴의 근육을 풀었다. 저 녀석에게 약점이 잡히면 안 된다. 나요한은 진리대학교 신방과를 졸업했다. 그 학교 신문사 편집부원 출신이기도 하다. 어쩐지 나요한은 부장 앞에서 서먹서먹해 하지 않았다. 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일 수도 있다. 나요한 같은 부류가 ‘동문’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온갖 모임에 불참할 리 없다. 부장은 나요한을 ‘요한이’라고 불렀다. 그 음성에는 인간애로 축적된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나에게는 ‘한 기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사적인 관계가 배제된 공적인 호칭이다.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변 부장도 진리대학교 출신이 아닌가. 하지만 변 부장은 나요한보다 날 더 신뢰했다. 변 부장은 나의 됨됨이가 미덥다고 누차 강조를 하였다. 게다가 새로 온 부장은 내게 심층취재를 맡기지 않았던가. 애초에 나요한을 키워줄 속셈이었다면 내가 아닌 나요한에게 중책을 맡겼어야 했다. 그런데 난 대체 대학 다니는 동안 뭘 했지. 왜 쓸데없이 등산 동아리에 가입해서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개고생을 했을까. 도대체 나의 선배님들은 대한민국의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거야. 때만 되면 동문회비 내라고, 동문회보 사라고 문자만 보내지 말고 제발 내 앞에 좀 나타나라. 나도 선배의 품에 안기고 싶다. 마피아식 패거리라고 욕을 먹더라도 부디 ‘패밀리’의 일원이고 싶다. ‘패밀리’조차 없는 고아보다는 낫지 않은가. 혹시 부장은 나요한을……? 아니다, 세상은 불공정한 듯 보여도 크게 봐서 공평하게 돌아간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 믿고 살다보면 정말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선배가 없는 자에게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 처음으로 담임을 한번 믿어 보자. 성실한 자는 모든 걸 얻는다고 그는 확신하지 않았던가.
31 며칠 만에 찾는 샹송빌딩이지만 왠지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하긴 그 죽음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몇 년 전에 봤던 공포영화 속의 귀신도 내가 샤워할 때마다 사물사물 내 두피를 더듬는데 '실화‘는 오죽할까. 하지만 이 많은 인파 속에서 이 장소를 기이하게 여기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하다. 모두들 어제 걷던 그 길을 오늘도 걸어갈 뿐이다. 김 형사나 곽 순경도 나 같은 기분을 느낄까? 나 혼자만 개운치 못한 불쾌감 아래에 노출되어 있는 건 아닐까. 샹송그룹 채용설명회장 앞은 졸업예정자와 취업재수생들로 북적였다. 석민 학생이 누워 있던 자리에 어느 뚱뚱한 남학생이 침을 뱉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지 연신 담배를 폈다. 그들은 생의 의지로, 보다 풍요로운 삶에의 각오로 세례를 받은 자들 같았다. 생의 욕망과 죽음에의 갈망, 그 교차될 수 없는 평행선이 저 위치, 바로 석민 학생이 누워 있던 그 자리에서 소실점으로 만나고 있었다. “뭐해?” 나요한이 멍하게 있는 나를 재촉했다. 넌 좋겠다. 삶의 장면 장면마다 더러 넋 놓고 주저앉는 버릇이 없으니.
“선배님, 안녕하세요!” 나요한은 샹송그룹 인사팀장에게 선배라고 불렀다. 도대체 이 거미 같은 자식은 얼마나 긴 실을 뽑아 이곳저곳에 엮어뒀단 말인가! 또 네 대학 선배냐고 내가 물었다. 고등학교 선배라고 히죽거리며 나요한이 답했다. 누가 대한민국 인맥이 3.4 다리만 거치면 다 통한다고 했던가. 그건 이론적인 평균치일 뿐이다. 나요한 같은 녀석은 두 다리만 거치면 대통령도 알고 지내겠다. 평균을 깎는 건 나일 테지. 난 동네 식당 아줌마, 편의점 알바, 가망 없는 공무원 수험생 우진이, 그나마 잘나가는 상규, 내 걱정만 하는 가족, 내 자존심만 건드리는 인간들, 그리고 별로 도움도, 피해도 안 주는 그 외의 인물들밖에 모른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거쳐 나요한을 알고, 나요한으로부터 두 다리를 거친 후에 대통령까지 알 수 있겠지. 어라? 정말 3.4다리만 넘으면 대한민국이 전부 ‘패밀리’네? 인사팀장은 샹송그룹의 신입사원 채용 정보를 소상하게 일러줬다. 준비해야 할 기본적 스펙은 물론이고 면접요령과 선호되는 인간성까지 말해줬다. 팀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남자 기준으로 왜 20대 후반이 되어야 비로소 신입사원이 되는 줄 알겠다. 저거 다 준비하고 군대까지 갔다 오려면 30년 가까이 걸린다. “우리 회사는 많이 안 봅니다.”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특히 변 부장처럼 신입사원의 인성을 강조했다. 조직과 융화될 수 있는 친화력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반골을 환영하는 조직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반골끼리 모인 반란군집단조차 일치단결을 제1의 강령으로 강조하지 않던가. 결국 팀장이 말하는 친화력이란 ‘대의’를 위해 사적인 논리를 양보할 줄 아는 ‘조정능력’이며, 나보다는 조직을 위하는 ‘희생정신’이며, 조직과 자신을 한 몸으로 여길 줄 아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샹송그룹…. 세상에 이토록 완벽히 윤리적인 집단이 또 있을까. 샹송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집합해 있는 저 욕망들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드넓어서 마치 이 세상 전체인 듯하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불러들인 걸까? 지극히 당연한 정시퇴근을 하면 신의 직장이라 불릴 수 있는 나라다. 그러면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노동시간과 격무를 하고자 이리로 기꺼이 모이고 모여 덩어리로 부풀려진다. 혹시 다수결 때문인가? 다수결의 원리는 민주정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의 본성이었다. 절대 다수가 끄덕이는 것 혹은 끄덕여야 하는 것, 그것은 윤리가 될 수 있다. 이웃집 여인을 태워 죽이며 마녀라고 외치던 남성들은 그 사회의 윤리적 인간이 아니었던가? 거대하고 견고한 윤리는 물리적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도 개인을 굴종시켜 단일한 욕망으로 통일할 수 있다. 파놉티콘 자습실에 수용돼 있던 내 친구들도 법조인으로 꿈을 통일시키지 않았던가. 미래의 사법기관과 준사법기관과 변호사로 가득 차 있던 파놉티콘 감옥이 과연 역설이기만 한 걸까? 윤리는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모양만 변할 뿐 축소된 적도, 후퇴한 적도 없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할 때마다 또 다른 형태로 둔갑하여 우리를 지도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는 그 안에 배태된 욕망으로써, 윤리로써 그 정체성이 설명된다. 우리는 몇 푼의 돈으로 죄를 씻어내는 중세의 윤리를 암흑이라고 표현한다. 보다 많은 유대인을 살상함을 영광과 애국이라 칭하던 그 광기의 윤리를 홀로코스트라고 욕할 줄도 안다. 산업과 자본의 시대, 혁명의 시대, 냉전의 시대, 탈냉전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시대, 내밀한 욕망조차 ‘글로벌 스탠더드’로 개종시키려는 시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시대는 훗날 어떻게 불릴까? 어떤 윤리가 우리를 지배했다고 평가될까? 어떻게 불리든 간에 확실히 우리는 보편적 윤리의 독재 하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번의 윤리는 좀처럼 눈에 띄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서서히 축적되는 독극물처럼 당장에는 문제될 게 없으므로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하, 나는 샹송으로 상징되는 보편윤리 앞에서 또 외톨이가 되는구나. 모든 게 옳으므로 결국 내가 그릇 살아가는 인간이군. 뭐, 어떤가, 나 역시 미래신문의 기자인데. 누군가는 나의 윤리를 재단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하겠지. 미래신문의 윤리가 나를 잉태한 것이 아닐지라도 나는 개세(開世)의 새끼가 되겠지. 내가 미래신문의 기자 자리를 원하는 딱 그 정도의 절박함이 분명 저들에게도 있다. 우리는 어떤 윤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러한 시대는 언제나 재현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설사 부도덕할 때는 있었을지라도 비윤리적인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다! 환멸을 거두고, 그 무엇도 탓하지 말고, 세계를 밝게 바라보자. 그래, 나는 미래신문의 인턴 기자다. 미래신문의 기자가 되고자 샹송그룹의 윤리학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것을 열심히 받아 적어 보편화 사업에 일조할 것이다. 나는 미래신문의 기자다. 나는 잡념을 떨치고 무리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까만 머리카락들이 무개성하게 우중충하였고, 햇빛에 반짝이는 샹송빌딩은 홀로 칼라사진인 듯 화려하였다.
32 “스펙 인플레이션이군. 아무리 스펙을 쌓는다한들 그 가치가 예전 같지가 않아. 평생 스펙만 모으며 살아야 할 판이군.” 취재를 끝낸 나요한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그는 취재보다는 지원자들의 이력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렇겠지. 나요한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저 덩어리 속에 파묻혀 줄담배를 피워야할지도 모를 테니. 나요한은 차에 오르기 전에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퉁겼다.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꽁초는 어느 할머니에게로 날아갔다. 그 할머니는 샹송빌딩 앞 사거리에서 풀빵을 팔고 있었다. 나요한은 손을 살짝 들어 미안함을 표했다. “늘그막에 저렇게 안 되려면 열심히 살아야지…….” 나요한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를 자극했다. 나는 어떤 반발심이 생겨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짜증스레 걸어오는 나를 노점 단속반이라 착각했던지 잠시 움찔했다. “얼맙니까, 풀빵?” “하나에 오백 원, 두 개 사시면 팔백 원.” 지갑을 열어봤다. 만 원짜리 두 장, 천 원짜리 세 장.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만 원짜리를 꺼냈다. 할머니는 당황하며 거슬러줄 돈이 없다고 했다. 그럼 대체 오늘 몇 개를 팔았던 거야! 하지만 애초에 거스름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만 원어치 주세요.” 늦은 오후에 내가 할머니의 장사를 개시해주자 행인 중의 몇 명도 덩달아 풀빵을 샀다. 할머니는 순식간에 떨이를 하였다. 나는 잠시 담배를 피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빈 광주리를 머리에 얹었다. 지구를 통째로 떠받치는 아틀라스와 풀빵 광주리를 이는 할머니, 이 둘을 두고서 어느 쪽이 더 큰 중압감을 버티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아틀라스가 지구를 포기하면 이 행성은 박살이 난다. 할머니가 풀빵 광주리를 내다버리면 그 인생이 작살난다. 할머니에겐 지구만큼이나 자신이 소중하다. 할머니도 아틀라스 못지않게 버겁게 사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것이 아틀라스형 인간의 윤리인가. 죽지 못해 산다고 말을 하면서도 삶의 연속을 결코 버리지 않는 것, 설사 더러운 바닥에 퍼질러 앉아 한여름의 태양을 증오하며 눈길이 던지는 수치심을 견뎌내더라도 자신을 위해, 또 누군가를 위해 결코 광주리를 포기하지 않는 진짜 아틀라스! 샹송의 보편윤리에 편입될 수 없음에도 꿋꿋이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이 끈질긴 윤리, 왜소한 무릎으로 풀빵과 인생을 지탱하는 윤리, 환율이 어찌 되든 유가가 치솟든 말든 풀빵 한 광주리로 세계를 비켜가고, 극복해내는 저 할머니의 윤리. 천칭저울 위의 할머니는 아틀라스처럼 전 세계와 평형을 이루는군. 하지만 나의 삶은 왜 이리 가벼운가. 할머니가 지하철역 안으로 사라지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요한이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만 원어치의 풀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우진이를 만나야 한다. 왜 이렇게 바쁠까. 인턴 주제에…….
33 “어, 우진이냐? 너 오랜만이다. 요새 뭐하고 지내?” 요즘 그가 뭐하고 지내는지는 잘 안다. “어…. 오랜만이다. 그냥 뭐….” “아직 노량진에 있냐?” 아차! ‘아직’이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 어…. 그렇지 뭐….” “저녁이나 같이 먹자. 너 저녁시간 때 강의 있냐?” “저녁에는 한가해. 근데 갑자기 웬일이야?” “친구랑 밥 같이 먹겠다는데 다른 용건이 있겠냐. 오늘 저녁 어때?” 그는 오늘 저녁에 스터디 모임이 있다고 했다. 나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취재원을 한꺼번에 몽땅 만날 수 있을 테니. 노량진으로 향하는 동안 내 기분은 다시 좋아졌다. 왜 출근길부터 엉뚱한 생각을 하며 하루 종일 불필요한 잡념에 사로잡혔던 걸까. 아무래도 악몽 때문이겠지. 잘 낫지 않는 감기에 걸린 듯 석민 학생이 미열처럼 남아 있다. 무슨 상관일까. 부장은 내게 중책을 맡겼는데! 우진은 스터디 친구들을 네 명 데려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 아틀라스, 두 아틀라스, 세 아틀라스, 네 아틀라스가 동시에 내게 인사했다. 그들은 모두 지쳐 보였다. 남자들은 디자인과 색깔이 거의 흡사한 반바지를 교복처럼 걸치고 있었다. 유일한 여학생의 복장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반갑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했다. 부장이 아침에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우중충한 안색을 보니 뭔가 우월감 같은 게 솟아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유쾌한 감정이다. “미래신문의 한상인 기자입니다.” 미래신문는 ‘진시황 세계정복’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신문사는 오직 ‘진’만 받아들인다. 간혹 ‘시황 세계정복’이 돌연변이처럼 끼어들 때가 있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숫자는 무시해도 되는 수치다. 그러니까 난 미래신문 기자라는 한마디로써 내가 얼마나 순혈인지, 높은 골품을 지녔는지를 손쉽게 알릴 수 있는 것이다. 인턴이라는 말은 뺐다. 그들의 풀이 죽은 표정에서, 나를 어려워하는 태도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말투에서 난 잔인한 기쁨을 느꼈다. 난 지주의 눈에 들어 처음으로 마름으로 뽑힌 자 같았다. 한때는 나와 동료였던 자들이 기죽거나 괴로워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다. 내가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 완장과 제목이 그리하는 것이니까. 난 아무 잘못이 없다. 난 그들 보고 기죽으라고 한 적이 없다. 알아서들 그리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가 왜 우쭐해 하는 걸까. 저들은 단지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 기죽을 필요도, 나를 어려워할 이유도 없다. 저들은 단지 저녁을 먹으러 여기에 왔을 뿐이다. 드디어 내가 미친 듯했다.
34 “얘는 내 친구야.” 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내가 인턴 기자란 걸 밝히지 않는 친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마 자신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이제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하나. 심층취재란 게 도대체 뭐지? 무슨 질문부터 해야 하나. 왜 우리 노사문화는 가르치지 않고 모든 걸 척척 해내길 바라는가! 안 되면 되게 하라,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 그들도 100미터를 5초 만에 달리고서 그런 말을 해주길 바란다. 그들 말대로, 하면 되니까! 호근이라고 불리는 친구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형님, 요즘은 공무원 시험이 고시예요, 고시! 요새 7급은 예전 5급이고, 지금 9급은 옛날 7급이랑 동격이죠!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5급 행정고시 준비하는 사람들은 예전으로 치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좌중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형님, 국회직 보십시오. 1000대 1입니다. 1000대 1!! 선관위는 또 어떻습니까! 그것도 1000대 1입니다. 1000대 1!! 1000명 중에 한 명만 붙고, 나머지는 또다시 시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의 말에 과장은 없었다. 그렇다고 흥미가 가는 것도 아니었다. 별다를 게 없는 정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공무원 시험을 치루는 건 아니니까. “네…. 그렇군요. 참 어려운 시험인 것 같습니다.” 이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어야 했다. ‘엘리트 기자’도 경쟁의 치열함을 인정해주자, 그들은 안심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친구와 마주앉아 소주를 기울이듯 일상사를 풀어냈다. “저는 새벽 5시에 일어납니다. 가산점 때문에 검도 학원을 가야하니까요. 검도를 하고 나서 종합반 강의를 듣습니다. 강의는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오후 2시에 끝납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오후 5시까지 복습을 합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편의점 알바를 뜁니다.” 경찰 공무원을 준비한다는 학생이 자신의 일과를 말했다. 그는 경찰 공채시험의 형법, 형사소송법이 고시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검찰직보다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 말에 검찰직을 준비하던 학생이 발끈하고 나섰다. 그러면 그렇게 쉬운 검찰직을 너도 하지 그래. 난 경찰이 좋아. 경찰이 좋긴 뭐가 좋아? 검사 지휘나 받으면서…. 뭐야! 그럼 넌 검사 따까리나 할 주제에! 그들은 한동안 소란을 피워댔다. 시험이나 붙고 싸워! 호근의 한마디가 그들을 제압했다. 호근은 7급 일반행정직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워 학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한다고 했다. 일은 간단하다고 했다. 강사들이 건네는 자료들을 복사해서 배포하고, 쉬는 시간마다 칠판을 닦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덕분에 그는 학원수강료를 면제 받는다. “얜 걱정이 없어.” 우진이 호근 학생을 가리켜 말했다. “민주화운동 국가유공자 가산점을 받거든….” “그것도 다 옛날 얘기야. 요즘은 가산점 적용 대상자의 합격 인원을 제한해서….” 방금 전까지 다투던 학생들은 호근 학생이 가산점 수혜 대상자라는 사실을 알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매우 복잡한 시선이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뭐가 가장 힘든가요?” “불확실한 미래죠!” 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건 당신들만의 얘기가 아닌데…. “다른 건요?”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도 짜증나요! 공무원 준비하는 애들은 패기가 없다느니, 안정적인 것만 추구한다느니, 아주 쉽게 말들을 하죠. 그래 쥐꼬리만 한 봉급을 누가 좋아할까요. 먹고 사는 게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면, 공무원 시험이야말로 어쩌면 몇 안 되는 인권의 보루일지도 모르죠.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데, 우린 정말 버림 받은 인간들 같아요. 노량진 전체가 고아원 같아요. 어른들에게 버림 받은…….” “돈이죠. 수강료는 해마다 오르고, 책값은 또 왜 그렇게 비싼지…. 학원 강사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투로 말들을 하면서도, 계절이 바뀌면 책을 새로 찍어내요. 판을 바꿔서 말이죠. ‘바뀐 수험환경에 대응하여 불가피하게 개정판을 내놓는다.’라는 친절한 안내문과 함께요. 그러면 불안해서라도 새 책을 사야 해요.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은 더 힘들어요. 서울 사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워요. 밥도 집에서 먹을 수 있고….” 그러자 호근이가, 뭘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집에서 밥 먹을 때마다 밥알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너희는 부모님 없는 곳에서 눈치 안 보고 살지 않느냐, 하며 앓는 소리를 했다. “솔직히… 먼저 합격한 친구들이죠. 솔직히… 걔들은 잊을 만하면 여기 와요. 관광지라도 되나 보죠? 그런 애들은 주말에 안 와요. 평일에 퇴근하고 오죠. 정장을 입고 말이에요.” “그래도 우리 안 잊고 와주는 애들은 고맙지…. 무진장 친한 척을 하다가도 합격하고 나면 언제 알고 지냈냐는 듯 쌩하니 돌아서는 애들이 더 많잖아.” 친구의 정장. 이 다섯 글자가 귓전에 스미자, 내 기억은 아주 오래전 일을 더듬었다. 대통령이 참관한다는 전국체전의 개막식 매스게임. 나의 15살은 레고처럼 조형되었다. 그해 봄은 운동장의 뿌연 먼지에서 시작되었다. 여름을 지나 10월에 이르기까지 나는 도형의 점이 되었다가 글자의 획으로 마무리 되었다. 여러 가지 색깔이 되기도 했다. 거대한 건축물 위의 하찮은 개인. 나는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의 벽돌 하나였다. 축제의 유일한 면제자는 경시대회 참가 학생이었다. 우리가 몸에 착 달라붙는 민망한 옷을 입고 한 덩어리가 돼 있을 때 그는 교복을 입고 유유히 과학실로 향했다. 친구의 교복, 그것은 단지 교복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은 자는 PVC로 매질을 당하지도, 군인처럼 열중쉬어 자세로 땅바닥에 머리를 박지도 않았다. 500명 중의 단 한 명. 친구는 500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저들은 친구의 정장을 어떻게 바라볼까. “……청년실업이 참 문제긴 문제죠?” 내가 청년실업 얘기를 꺼내자 그들의 눈에 적개심이 번뜩였다. 여학생이 가장 노골적이었다. “솔직히… 취업할 때 여자들 외모 가지고 차별 많이 받잖아요. 솔직히… 회사에서는 예쁜 여자만 뽑잖아요. 내 친구도 좋은 대학 나와서 스펙 빵빵하지만 대기업 못 들어갔어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지만요. 하지만 예쁜 애들은 다 잘만 들어가더라고요. 남녀차별 안 하는 세상이라고들 하죠.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같은 여자 안에서는 엄연히 차별이 존재하더라고요. 솔직히… 지들이 예쁘면 언제부터 예뻤다고…. 다 고친 거면서…. 다 고쳐놓고 자기는 처음부터 예뻤던 척하면서 잘난 체하는 꼴을 정말 봐주기 힘들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우진은 너도 코랑 눈 했잖아, 라고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그는 여학생의 칼날 같은 시선을 한 번 맞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솔직히, 솔직히! 아, 여학생이 매 문장의 시작마다 저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말의 내용은 어느 정도 옳았다. 취업난은 심했다. 특히 여자에게 더 심했다. 예쁘다는 소리를 못 듣는 여자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내친 김에 말을 계속 했다. “솔직히… 경찰만 해도 그래요. 남경은 필기합격점수가 80점 안팎이에요. 하지만 여경은 그것보다 10점은 더 높아야 하죠.” 그러자 이번엔 경찰 수험생이 발끈하고 나섰다. “누가 들으면 남경은 쉬운 줄 알겠어. 지난 정권 때 경찰 4교대 시행하겠다고 해서 공채 인원을 왕창 늘렸지. 그 때는 일 년에 시험이 세 번씩이나 있었어. 한 번에 1,000명씩! 그런데 요즘은 이게 뭐야. 정권이 바뀌고부터 4교대는 물거품이 됐어. 덕분에 공채 인원이 확 줄어들었잖아. 전 정권에서 경찰을 워낙 많이 뽑았으니 인력공급이 과잉이 된 거지. 게다가 6급 이하 정년연장 때문에 퇴직하는 인원도 없어요! 아, 정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정권 바뀔 때마다 채용인원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어른들은 청년들 실업문제 말로만 걱정하면서도 자기들 정년연장에는 혈안이 되고…. 어디 기댈 데가 없어요!” 그는 내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내가 자신들을 잘 대변하는 기사를 써주길 바라는 듯했다. 그러면 정부가 청년실업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까? 그는 특히, 공공부문의 채용이 증가하길 바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 듯싶으냐? 기자가 대통령이냐? 대통령도 버거워 하는 문제가 청년취업난이다. 나도 그 청년들 중 하나란다. “그건 그래.” 우진이 입을 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무원 채용인원이 뒤죽박죽인 건 사실이야. 그리고 기성세대의 이기심도 문제야. 모두들 습관적으로 정의와 공공선을 외쳐. 하지만 그 정의와 공공선을 위해 자신의 불이익과 손실이 초래된다면 가장 약한 자의 얼굴을 하고서 하소연하지. 그게 안 먹히면 전사로 변신하고 말이야! 어차피 사는 게 다 그런 것이겠지만…. 다들 자기 밥그릇을 위해 투쟁해. 어차피 세상이 이런 거라면 나도 내 몫을 쟁취해내고 말 거야! 난 그 동안 너무 어리석게 살았었어. 지나치게 순진했어! 게으르기도 했고……. 결국 고통스러워지는 건 나야. 행복해지는 것도 나고. 고통과 행복을 결정할 수 있는 것 역시 나 자신이란 말이지. 상규가 옳았는지도 몰라.” 우진은 변해 있었다. 그는 딱히 대단한 점이랄 게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분명 심장에 달려 있었다. 그런 부류의 인간은 심장이 뜀박질 할 때마다 양심이 각성된다. 그는 일반적 견해 뒤에 숨은 비정상성을 짚어낼 줄 알지 않았던가. 스스로를 객관화시킨 후에 자기반성을 하질 않았던가. 그런 그였다. 그에겐 최소한의 비판의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그는 상규가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몰가치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진은 방금 ‘쟁취’란 말을 썼다. 그건 겨루어 싸워서 얻는다는 뜻이다. 자신이 게으르다는 말도 했다. 우진은 게으르지 않았었다. 단지 방황했을 뿐이다. 우진은 왜 이렇게 어두워졌을까. 그는 이제 막 ‘철’이 드는 것 같아 보였다. 나 역시 그렇지 않은가. 나도 우진처럼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옛 부장에게 아부를 떨고, 지금의 부장에게서 또 한 번 기대를 건다. 들장미, 꽃밭, 야생마, 과부댁이 풍기는 오래된 냄새에 역겨워 구토를 했다. 그래도 부장에게서 풍기는 썩은 내는 용케도 잘 참아 왔다. 무엇이 차이인가. 들장미, 꽃밭, 야생마, 과부댁 앞에서 더러운 걸 게워도 내게 올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부장의 냄새를 맡고 토를 한다면 난 어찌 되었을까. 나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닌가. 내가 생각하던 나는 희뿌연 옛날처럼 스러져간다. 한철의 순수함도 같이 사그라진다. 그 붕괴의 한가운데에서 내가 누군지도 잊어가고 있다. 철이 들었다, 어른이 되었다, 인생이 다 그런 거다. 누군가는 이 변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다. 학생들은 자신들 때문에 내 기분이 상한 걸로 착각을 했다. 그들은 내 눈치를 살폈다. 우리는 조금 더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공무원 수험생들이 느끼는 애환을 정리했다. 내 일상에서 발견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자리를 뜨고자 했다. 그런데 낯익은 여학생이 내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저기… 실례지만…….” “네?” “성함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혹시 기자님 아니세요?” “네, 한상인 기자입니다만… 설마, 유리알 씨?” “네, 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사실 나 역시 아까부터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봤었다. 난 그녀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체할 필요는 없었다. 좋은 만남도 아니었고…. 네 친구가 오늘 새벽에도 내 꿈에 나타났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설마, 유리알 씨? 라고 했던 걸까. 기초적인 국어문법도 잊어버린 건가. 설마가 아니라 혹시, 라고 했어야 했다. 유리알을 만나는 게 꺼림칙했던 걸까. 저 여학생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우연히 마주치는 것조차 싫었던 걸까. 설마, 유리알 씨라니! 그녀는 우리 대화중에 ‘기자님’이라는 소리를 듣고서 나를 알아본 듯했다. 내가 기자가 맞을까…? “어…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 어차피 밥도 다 먹었고… 또 연락해.” 우진은 친구들을 데리고 나갔다. 부디 올해는 합격하기를…. 유리알 뒤에는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낯에 익은 얼굴이었다. “혹시 이규원 씨 아닙니까? “…….” 이규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울해 보였다. 나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