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인식개선신문=최봉혁기자)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수상작 연재] 대상 김민주 - ⑤거울의 방 16 나는 기사의 제목을 애초대로 「부유층 공무원, 샹송빌딩 자살테러!」로 정했다. 나에겐 북한의 연평도 도발보다 다음 주에 있을 발표가 더 긴급한 사태다. 그러니 <속보>라는 글씨로 사이렌을 울림에 주저함이 없었다. 적절한 스토리텔링도 양념 삼아 곁들였다. ‘테러 수준의 자살’, ‘공직사회에 암약하는 사회불만세력’, ‘공무원 채용 시 정신건강 필수 체크’ 등의 표현이 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가 재학 중인 대학을 내 멋대로 ‘명문대’로 승격시킴으로써 뭇 네티즌의 돌을 맞을 준비도 했다. 물론 위험수위에 다다르지 않는 한에서, 자극적인 사진도 몇 장 보너스로 제공했다. 과연 조회 수는 나와 부장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그는 나의 어깨를 힘껏 쳐주었다. 나는 달콤한 통증을 느꼈다. 나요한도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기사가 뜨자 댓글들이 소란스레 달리기 시작했다. 재야의 탐정들은 나름의 추리와 분석으로써 죽음의 이유를 추적했었다. 그들은 이 사건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두고서 한동안 공방을 벌였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왜 그런 방식을 택했는가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약간의 음모론도 제기됐다. 이즈음해서 정치적으로 소란스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철한 자들은 결국 자살이라는 경찰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살이라고 믿는 이들도, 타살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정작 학생이 왜 죽음을 택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짚지 않았다. 그 점은 기사를 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 기사는 엉뚱한 방향에서 인기몰이를 이어갔다. ‘서울 소재 모 명문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나는 씩 웃었다. 이것 때문에 논의의 초점은 자살 문제에서 이탈했지만 상관은 없었다. 뭐라고 떠들든 내 기사를 클릭만 하면 된다. 지방대는 폐가망신 한다… 학벌서열은 ‘진시황 세계정복’이 진리다… 아니다, ‘진황시 계세정복’이 옳다… 모두 틀렸다. 진리대학교는 시공대학교에 곧 따라잡힐 것이다… 이런 병신들이 또 서열 매기고 자빠졌군. 세계 100위 안에도 못 드는 주제에… 그러는 넌 대학이나 다니냐…. 이런 댓글들이 넘쳐날수록 기사를 보는 이들도 더 많아졌다. 아무래도 보통 죽음은 아니었다. 샹송빌딩에서의 투신과 염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느꼈을 고통이 컸을 만큼 많은 이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염산과 샹송빌딩 자살이 인터넷 포털 검색어 순위 1․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30분 뒤, ‘지하철 무개념’이라는 동영상이 뜨고부터 검색어 순위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2시간 뒤, 동영상 속 남성의 신상정보가 유포되었다. 이로써 석민 학생의 죽음은 완전히 잊혀졌다. 진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나요한은 고기를 구울 때와 똑같은 불길함으로 부장의 표정을 힐끗 쳐다봤을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이때쯤 되면 그는 고개를 숙여야 하니까.
17 마음이 더없이 가벼워졌다. 이제 3일 후면 정규직 합격자가 발표된다. 하지만 그 무게감은 예전 같지 않다. 나는 깃털처럼 가볍게 인혜의 차에 올라탔다. “차 언제 뽑을 거야?” 항상 날 태우고 다니는 인혜는 종종 이 말을 했다. 자동차에서 시작한 그녀의 투정은 연봉, 연금, 펀드, 적금, 결혼, 아파트, 생활의 안정, 임신과 출산, 노후대책, 잘 나가는 친구, 그 친구의 더 잘나가는 남자친구, 이미 결혼한 친구의 남편, 그 남편의 화려한 직장 등으로 퍼져나가곤 했다.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부정도,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 손으로 다 해야 할 일들이다. 그녀는 20대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100가지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자기계발에 게을리 하면 뒤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30대에 반드시 해야 할 100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10년에 100가지면, 1년에 10개다. 얼추 한 달에 한 가지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렇게 바삐 사는 그녀였기에 신경이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바쁘게 만드는 것일까. 어제를 헛되이 보낸 자에겐 오늘이 없다고들 한다. 오늘을 허비한 자에게도 내일이 없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어제와 오늘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그 내일조차, 내일이 되면 오늘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내일을 위해서 영원히 제자리에서 뛴다. 그녀가 뛴다. 나도 덩달아 뛴다.
18 학교 운동장에 여러 명의 친구들이 뛰고 있었다. 일정한 속도로, 정해진 트랙을 따라 달리는 그들은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무리 속에서 허겁지겁 뜀박질을 하는 나도 보였다. 나는 숨이 넘어갈듯 다리를 뻗었지만 계속 무리의 맨 뒤에 쳐져있기만 했다.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지구가 자전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너 어디 가? 내 바로 앞의 뒤통수 하나가 대열에서 이탈하자 나는 그를 불렀다. 그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계속 달리면서 친구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학교 밖에서 계속 달렸다. 남쪽 담장을 사이에 두고 그는 뛰었고, 나도 뛰었다. 여기가 어디지? 어느새 나는 북쪽 담벼락 너머의 초등학교로 달리고 있었다. 친구의 뒤통수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운동장의 아이들은 계속 달리기만 했다. 달리던 아이들은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웃지도 않았다.
어쩐 일일까…? 침대 위에 걸터앉아 궁리를 해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휴학을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1년 후 복학하였지만 결국 자퇴를 하였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내게 있어 그는 늘 뒤통수였다.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해본 적도 드물었고, 얼굴조차 기억에 흐릿하다. 그는 7번이었다. 나는 15번이었으므로 항상 그의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늘 뒤통수만 내게 보여주었다. 꿈속의 뒤통수는, 교문 밖에서 나와 나란히 달리던 그는, 그 친구일까……. 꾸벅꾸벅 졸며 읽었던 프로이트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크지도 않은 머리통을 아무리 뒤져봐도 꿈 해석의 요령을 찾지 못했다. 그는 7번이었으므로 로또를 사볼까? 나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꿈은 괴이쩍었지만 변기에 앉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토요일이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라니… 이틀 후면 발표가 나는구나…. TV를 틀었다. TV는 종편채널사업의 진행과정을 전하며 종이신문과 자신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었다. 무슨 위원회의 부장을 만나고 온 우리 부장은 무어라 내색은 하지 않았었다. 다만 회사의 주식을 더 사들였었다. 주식을 살 여유가 없던 나는 대신 부장과 같은 교회에 다님으로써 미래에 투자했다. 왜일까? 꿈 때문일까? 자꾸만 석민 학생의 시신이 떠올랐다. 당연하다. 끔찍하긴 했으니까. 나는 종종 불쌍한 인간의 몰골을 구경함으로써 나의 안락함을 확인하려 든다. 나와 무관한 가난, 상관없는 죽음, 동떨어진 비극을 아주 멀리서 관조한다. 더러 그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을 때조차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내가 아프리카 난민을 TV로 보는 것처럼 무덤덤하다. 가장 비참한 것들이란 나와 무관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관련 없어야 한다. 물론 내게 공감능력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비탄 같은 기초적인 인간성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지하철 바닥을 엉덩이로 쓸며 동전을 구걸하는 자에게 슬픈 시선을 적선하고, 혹한의 길바닥에서 야채를 파는 노파에게 동정을 던질 줄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들과 심리적 이웃일 수 있고, 그런 나는 참 인간적인 매력을 가졌다고 안심하기도 한다. 석민 학생의 죽음도 일종의 지하철 껌팔이였고, 야채 파는 행상이었다. ‘달리는 친구’도 한때는 그 정도의 의미였다. 타인의 불행 앞에서 예의를 차려 잠시 숙연해하는 지금, 내가 약간의 인간성을 보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19 아침부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네, 그런데요. … 네. … 그래요? … 그러죠. … 네, 알겠습니다.” 어제 내 전화를 받지 않던 이규원 학생이다. 그는 부재중 전화를 발견하고서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이른 시간임을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그는 내게 와달라고 했다. 주말을 빌어 오후 버스로 고향에 내려갈 것이므로 되도록 일찍 와달라고 했다. 이제 그를 만날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것은 그와 인사를 나눈 후였다. “여기가 석민이의 방이에요.” 이규원은 석민 학생의 방을 가리키며 서성이고 있었다. 어제 봤던 김영강은 이규원의 등 뒤에서 내게 고개를 꾸벅였다. 방 두 개에 거실 겸 주방이 딸린, 비교적 넓은 공간이었다. 그들은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그들의 자취방은 여느 남학생의 자취방과는 달리 매우 청결하다 못해 향기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모든 것이 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밥솥, 수저통, 소형 냉장고가 각자의 주인을 모시고 있었다. 찬장은 두 개였는데 그들은 남의 찬장 속에 자신의 식기를 넣어두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가스레인지만큼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스레인지 외엔 다 따로 썼어요. 석민이가 그렇게 하길 원했거든요. 그는 자기 수저통에 남의 수저가 섞이는 걸 무척 싫어했어요. 자기 냉장고에 내 김치를 넣어뒀던 날에는 고함을 지르더군요. 그게 그렇게 화낼 만한 일인가요? 내가 그렇게 더러운 것도 아니고….” 규원은 공짜로 사는 서러움부터 토로했다. 그걸 들으러 온 건 아닌데. “하지만 무척 깔끔하군요. 꼭 여학생 방 같아요.” 그들은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청소를 하는데, 이번 주는 석민 학생의 차례였기에 평소보다 말끔하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규원은 팔짱을 낀 채 내 시선을 따라 다녔다. 그는 눈이 충혈 돼 있었다. 김영강으로부터 석민 학생의 소식을 듣고서 어젯밤은 영강의 자취방에서 보냈다고 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석민 학생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문은 잠겨있을 거예요. 석민이는 외출할 때마다 늘 방문을 잠가뒀었거든요.” 낯선 남자가 겁도 없이 망자의 문을 열려고 했지만 둘은 지켜만 보았다. 풀기 두려운 봉인은 이방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듯이. “열려 있는데요?” 내가 문손잡이를 돌리자 방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나를 받아들였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거실보다 더 강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향기가 너무 강해 코는 이내 마비되고 말았다. 나는 석민 학생을 탐색할 하나의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기사는 이미 다 썼다. 그것도 부족해 부장은 내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이제 석민 학생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데 어째서 나는 그의 방을 엿보고자 하는 걸까? 아마 죽음의 방식이 퍽 인상 깊었기 때문이리라. 혹은 비참한 자를 훔쳐봄으로써 나의 안전을 만족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여전히 방을 주시한 채 규원에게 물었다. 방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그 뿐이었다. 그 뿐이었음에도 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묵묵한 암흑은 꼭 무언가를 숨겨놓은 것만 같았다.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것은 날 덮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방을 주시하는 게 불편했음에도 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 올 때 이후로는 한 번도 들어와 보지 못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석민이는 꽤 까다로운 성격이었거든요. 그 친구는 내가 이 방에 들어오는 걸 무척 싫어했어요. 내 땀기 축축한 양말에 묻어 있는 세균이 자신의 공간을 더럽히는 게 싫다는 말까지 했어요. 어떤 때는 저를 인간적으로 혐오한다는 느낌까지 받곤 했어요. 하지만 그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어요. 제가 돈이 부족할 땐 흔쾌히 빌려주기도 했어요. 그는 꾸어준 돈을 독촉한 적도 없었어요.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규원의 음성에는 얹혀사는 이의 서러움이 묻어 있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영강은 ‘역시 그 형은 이상하단 말이야’라는 말로써 규원을 다독거려주는 듯했다. 그들은 망자와의 약속을 지키려는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방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분이 너무나 묘했기에 꿈을 꾸는 듯했다. 꿈속에서 땅이 푹 꺼진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면 이 방은 추락의 종착지인 셈인가? 꿈과 현실을 연관 짓다니, 바보같이……. 이 방은 단지 그 주인이 어제 죽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방을 적절히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을 뿐이다. 알고 보니 그는 꽤 유치한 사람이었군. 석민 학생은 이상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눈을 아래로 향할 수도, 위로 치켜뜰 수도 없었다. 시선을 움직이는 사소한 행동조차에도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섬뜩하리만치 요상한 벽지였다. 벽지는 검은고양이의 털가죽을 벗겨 입힌 것처럼 완벽한 암흑빛이었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벽이고, 어디서부터가 빈 공간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방은 짙은 검은자위만 뜨고서 날 묵묵히 쳐다보더니, 이내 시커먼 입을 하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방이 워낙 어두웠기에 흰 벽지가 검게 보였을 수도 있다. 세상에, 검은색 벽지란 게 존재하기라도 할까? 네모난 삼각형이라는 개념이 그렇듯 검은 벽지란 존재할 수 없는 사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검은색이었다. 그것은 벽지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럴싸하게 사람을 홀려 결국 미치게 하는 흑마술(黑魔術)이었다. 대체 저런 벽지를 왜, 무슨 생각으로 생산했으며 또 그것을 구입한 것일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일지라도 저 벽지에 둘러싸여 생활을 한다면 그는 반드시 얼마 못 가 해괴한 짓거리를 해댈 텐데, 김영강의 증언대로 ‘조금은 이상한’ 석민 학생이라면 더더욱 그럴 법했다. 그의 독특한 기벽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일까. 그게 아니고서야 이 벽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이 벽지야말로, 이 벽지에 포위된 방의 음침함이야말로 석민 학생이 자신의 결심을 넌지시 알린 메시지였음을. 그러나 그는 한편으론 이 방을 완벽히 봉쇄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보여 왔다. 왜 염산으로 자신을 모조리 지워버린 채 하필 샹송빌딩에서 죽음을 맞이했던가? 어째서 유서 한 장 남겨두지 않았음에도 그의 방문은 열어두었던가? 무엇보다, 공무원 시험에 단번에 붙을 만큼 순조로웠던 그의 인생은 왜 스스로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던가! 자신이 지워진 것 같다니, ‘찌질이’나 해댈 법한 소리를 어째서 그가 내뱉었단 말인가. “그 형은 조울증이었어요.” 영강이 이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난 끝내 벽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조울증이라뇨?” 하지만 난 여전히 뒤로 돌아보지는 못했다. 이번엔 형광등을 제거해놓은 빈 전등이 나를 붙잡아두었다. 불행하게도, 천정의 벽지도 온통 시커먼 색처럼 보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게 참 이상하죠. 그 형은 우리처럼 힘들게 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집에서 매달 웬만한 월급쟁이만큼 생활비를 타 쓰지, 학자금 대출 받을 필요도 없지, 학점 잘 나와 장학금까지 받지, 설렁설렁 공부해도 공무원 시험에 턱하니 붙어버렸지…. 정작 힘들어 해야 할 사람은 우리 아닌가요? 그런데도 형은 우리보다 더 괴로워 보였어요. 어떤 날엔 기분이 무척 들떠 있다가도, 또 어떤 때엔 곧 죽을 사람마냥 침통해 했거든요.” 형광등이 없이 무엇으로 방을 밝혔을까? 흑마술에 걸린 나는 계속 천장만 바라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시험 준비하느라 힘들었나 보죠.” “아뇨, 그 형은 공부도 별로 열심히 안 했어요. 시험이란 게 운칠기삼이라더니, 그 형이 딱 그 꼴이죠.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서도 잘 찍었는지, 아는 문제만 나왔는지 몰라도 한 번에 찰싹 붙더라고요.” 그는 어째서 형광등을 빼놓은 것일까. 게다가 창에는 두꺼운 커튼까지 드리워있지 않은가. 조금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방에는 그 흔한 거울조차 없었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불쑥 들자 팔뚝에 오돌오돌 돌기가 솟아났다. “……그렇군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내린 조울증 진단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조울증이든 말든 나와 상관없지 않은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대충 대꾸해주자 영강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방이 꽤 어둡고 싸늘하군요. 그는 원래 춥고 어두운 곳을 좋아했나요?” 이번엔 규원이 증언할 차례다. “그랬던 것 같아요. 석민이는 주로 자기 방에는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 덕에 거실은 제 차지가 되었었죠. 대체 방에서 무얼 하나 싶어서 석민이가 드나들 때 방 안쪽을 슬쩍 본 적이 있었어요. 별로 특이점은 없었어요. 전등은 꺼둔 채 컴퓨터만 하던데…. 그거야 뭐 저도 그러니까요.” 아직은 내 발이 거실에 있었다. 난 환한 곳에서 어두운 곳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규원이 말한 저 컴퓨터, 컴퓨터 속에 펼쳐진 무언가를 살펴보기 위해선 석민 학생의 방에 들어가야 했다. 방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문도 열어두지 않았던가. 하지만 난 잠시 주춤했었다. 왜 굳이 이 방에 들어가야 하나. 왜 나는 저 컴퓨터를 궁금해 하나. 기사는 이미 다 쓰지 않았던가. 아니다, 늪지대 같은 사이코의 공간은 쉽게 접하기 힘들다. 봐두어야 한다. 그래야 저널리즘을 하든 스토리텔링을 하든 훗날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내 방에 들어가듯 대수롭지 않게 들어갔다. 등 뒤에 남겨진 두 학생이 계속 침묵해주길 원했다. 정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온전한 고요 속에는 꼭 무언가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방문이 바람에 밀려 ‘끼이익’하고 소리를 내자, 난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닭살이 돋는다는 것은 춥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방의 한 가운데에서 멈췄다. 고작 세 걸음을 걸었는데, 방문 밖의 두 사람과 나의 거리는 한참 멀게 느껴졌다. 잠수를 끝낸 다이버는 물과 뭍의 경계에 머물러야 한다. 그들은 감압쳄버에 체류함으로써 육지로의 여권을 받아낸다. 석민 학생은 나의 방문을 허락하였지만 방의 압력은 쉽사리 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조금만 더 머물다 다음 걸음을 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알 수 없는 압력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압력은 낮아졌다. 내 발은 가벼워졌다. 마침내 손을 뻗으면 책상을 건들 수 있을 만큼 난 고지에 가까워졌다. 책상은 매우 널찍한 점 외에는 특이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가운데에 낡은 컴퓨터와 스탠드가 하나씩 놓여 있을 뿐이다. 석민 학생은 이 등불 하나만 허락했다. 스탠드의 모가지는 아주 낮고 구부정하게 접혀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꼭 필요한 부분만 비추었겠지. ‘삐빅’ 스탠드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조명은 빛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희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얼마나 기괴한 곳에 포위되어 있었는지 깨닫게 해주기엔 충분했다. 나는 스탠드를 켬으로써 방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광기 어린 어둠이 초라한 빛을 밀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벽은 물론이고 바닥이며, 천장까지도 모조리 검은색 벽지로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술에 취해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잔 사람은 잠이 깬 후 어떤 기분이 들까? 그는 평온할 수 있을까? 그 무덤이, 무덤 속의 유령이 그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그는 상쾌할 수 있을까? 그냥 잠이나 더 잘걸 그랬다. 아니, 이 방에 들어오지 말걸 그랬다. 아니다, 저 스탠드를 켜지 않기만 했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게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공동묘지의 취객은 차라리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벽지는 자신의 역할을 훌쩍 뛰어넘어 거울을 대신하고 있었다. 육면이 거울로 된 방에 들어간 사람은 모든 면이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거울은 서로를 반사함으로써 무한정의 거울을 모사한다. 이 방이 그랬다. 벽에는 거울 한 점 없었으나, 모든 벽이 동일하게 어두움으로써 서로를 반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의 어둠은 무한정으로 발산했고, 나는 암귀(暗鬼) 같은 거울의 자기복제 앞에서 또 한 번 한기를 느꼈다. 그것은 또한 벽화와도 같았다. 한없이 미약한 인간이 초월적 존재와 감응하고자 할 때 혹은 꼭 남기고픈 삶의 한 장면을 보존하고 싶을 때 태곳적의 인간은 벽화를 그렸다. 벽화는 태워버릴 수 없고, 구길 수도 없다. 벽화는 오로지 지워질 때 부정된다. 한 인간이 철저히 지워졌듯이……. 그런데 지금 나를 노려보는 저 벽지는 그야말로 벽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주문(呪文)을 외는 듯했다. 석민 학생의 목소리가 이 주문을 타고 내게 침투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재수 없는 방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민 학생은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한데 어째서,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리로 왔고, 이 방을 탐색하고 있는가 말이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였을까? 꿈이 인상적이었다고 자살한 학생의 방을 아침부터 기웃거리나? 아니, 꿈과 석민 학생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마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이규원의 전화를 받아서였을 것이다. 나는 어젯밤 무척 피곤했고, 잠이 깬 후에도 몽롱했었다. 그래, 그것이다. 이규원을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난 꿈을 꾸듯 어제의 타성에서 못 벗어났던 것이다. 어제 했어야 할 일을 오늘 해야 할 것처럼 난 자연스레 이리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내가 이 방에 주눅이 들어야 하나. 저 새까만 벽지는 무엇이며, 이 기괴한 분위기는 또 무어란 말인가. 김영강의 말처럼 죽은 이는 조울증 환자였을 수도 있다. 기사도 다 쓴 마당에 무엇 하러 그의 죽음을 들추어야 하나. 어차피 모레면 나도 죽을지 모른다. 나의 모래시계는 지금도 떨어지고 있다. 그런 내가 왜 망자에게 나의 휴일을 반납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불길한 방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 멍청하게도 전혀 불필요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벽지든 커튼이든 형광등 사라진 전등이든 간에 나를 누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인생을 소중히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이 방의 주인은 그렇지 못한 ‘조금은 이상한’ 청년일 뿐이니까. 이곳은 나와는 무관한 방이니까. 내가 마음을 먹고 몇 발자국만 걸으면 밝은 거실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20 나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선 마지막으로 방을 한번 휘 둘러볼 요량으로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박물관의 유물을 힐끗 쳐다보듯 그렇게 응시했다. 나를 잠시 춥게 만들던 벽지는 이제 식상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뒤돌아서서 햇살 드는 거실로 향했다. 이번만큼은 들어올 때처럼 감압의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뭔가 빠트린 듯했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나를 잠시 주춤하게 했다. 나는 입장할 때처럼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그래, 책상 위에 노트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왜 진작 볼 생각을 안 했을까. 내가 그걸 본다고 해서 저 두 사람이 날 막진 않을 것이다. 그들도 궁금할 테니. 아니다. 그냥… 갈까. 하지만 나는 어느새 다시 책상 앞에 서 있었다. 대체 뭐라고 적혀 있을까. 저 공책은 그의 숨겨진 유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9급 공무원에 응시했었어요. 자신은 끈기가 없어서 7급을 칠 자신이 없다면서요.’ 불현듯 유리알의 증언이 떠올랐다. 그래, 석민 학생은 끈기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원망했음이 분명하고, 9급 공무원에 머물러야 한다는 걸 저주하고 있었으리라. 그는 아마 야심이 다분한 인물이었을 텐데, 하위직 공무원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부셔버리고 싶었으리라. 이제야 이 방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석민 학생은 부끄러운 자신을 밝히고 싶지도, 외부에 노출시키고 싶지도, 스스로를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형광등을 빼둔 전등, 두꺼운 커튼, 낮게 구부러진 스탠드, 얼마 되지도 않는 빛을 남김없이 흡수해줄 검은 벽지… 그리고 거울의 부재. 이제 확신이 든다. 석민 학생은 정말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을 혐오하여 자신을 지워버렸다. 아니다, 석민 학생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자살충동을 자주 느낀다. 가까운 과거든 먼 과거든, 지나간 시간이 지금을 후회스럽게 만들 때 우리는 현재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 나는 애초에 이런 인생을 살 사람이 아니었는데, 과거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지금의 내가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불행한 인간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난 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뭐, 상관없지 않을까. 나 역시 타인의 시선 안에서, 그들의 마음이 빚어낸 형상대로 조형되고 오해 받으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참 멋진 구절이군요.” 둘은 어느새 방에 들어와 있었다. “네?” “‘우리 마음이 지닌 감정 외에 우리 손이 가진 것이란 없다. 마음을 명령하기보다는 순명(順命)하는 것이 더 낫다 - Abelard’ 저기 저 글귀 말입니다.” 영강은 모니터에 붙은 메모지를 발견하고선 거기에 적힌 메모를 읽었다. “저게 무슨 뜻일 것 같습니까?”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현실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만족하라는 의미 아닐까요?” “…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나는 딴생각에 잠겨 대답을 느릿하게 했다. 공교롭게도 저 말은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었다. 나는 아벨라르(Abelard)가 어떤 맥락에서 저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석민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저 글귀를 이해했던 것일까? 아니면 영강이 지적한 의미대로 해석했던 것일까? 죽은 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대충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부정했다. 자신을 죽였다. 제 손으로 제 얼굴을 없앴다. 분명히, 그는 이제 죽은 사람이다. 자신을 모조리 지워버린 채로 그리했다. 한편으론 그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면서 그리했다. 정말 모를 일이다. 정말이지 더는 그 학생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그를 더 파고들었다간 나까지 이상해지리란 불안을 느꼈다. 그는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아무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층계의 어디쯤에서 21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비 오는 일요일이다. 오후의 카페는 한산했다. 교회에서 만난 부장은 즐거워 보였다. 그는 내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나의 운명을 알고 있을 게 아닌가! 초조해졌다. 인혜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더는 기다리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날 믿는다고도 했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야! 나 심심해!” 잡념이 너무 길었는지 인혜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어… 아니, 그냥….” “저기….” “응?” “아냐…. 아무것도….” 그녀는 말을 꺼내다말고 도로 집어넣었다. 뭔지 대충 짐작은 갔다. 아마 이 짐작이 맞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대개 적중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면 해결될 일이니까. 인혜의 부모도 딸이 인턴 기자 따위와 어울리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겠지. 그녀는 나보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 그러니까 수능을 더 잘 쳤다는 말이다. 그쪽 집에서는 그 점을 불만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인혜 아버님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내 관상이 마음에 든다고 덕담도 해주셨다. 그분의 음성은 시종 미지근했다.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다. “그래… 자네 아버님은 뭐하시는 분인가? 그분은 위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니까. 혹은 뿌리로부터 물은 것일 수도 있겠다. 뿌리를 보면 꽃의 생명력을 알 수 있으니까. “네, 퇴직 공무원이십니다.” “그래? 무슨 공무원이셨는가?” “네, 경찰이셨습니다.” “흠… 경찰이라…….” 그분은 말꼬리를 흐리셨다. 무언가를 더 원하는 눈치였다. 그분은 분명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나는 윗물에 대한 추가정보를 제공해야했다. “경정이셨습니다.” “…….” 그분은 대답이 없으셨다. 혹시 ‘경정’이라는 계급을 ‘경장’으로 잘못 들으신 건 아닐까. 나는 불안해졌다. “경, 정으로 퇴직하셨습니다.” 나는 발음을 보다 정확히 했다. 그분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셨다. 왜 웃으셨을까. “그래? 훌륭한 아버님을 두었군. 난 검찰 서기관으로 퇴직했네.” 그분은 굳이 자신의 직위를 밝히셨다. 그리고 자신보다 아래인 나의 아버지를 훌륭하다고 평가해주셨다. 27평 아파트면 괜찮지. 29평에 사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대학은?” 이제 아랫물 차례였다. “네, 복음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분은 찻잔을 조용히 입으로 가져가셨다. 내가 다닌 복음대학은 ‘1.9류’로 분류되곤 한다. 복음대학교는 일류는 절대 아니고, 이류라 하기엔 섭섭하다. 그렇다고 1.5류라고 하기에도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붙여진 게 ‘1.9류’다. 진시황 세계정복! 진리대학교에서 발원하여 복음대학교에까지 이르는 당당한 흐름. 1.9류면 그래도 대학 전체로 보자면 엄연히 상류다. 담임의 말이 옳았다. ‘진시황 세계정복’의 럭키세븐에 들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안타깝게도, 그녀는 진리대학교 다음으로 칭해지는 시공대학교를 나왔다. “직업은?” 인혜는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셨다. “기자입니다.” “오! 그래? 어느 신문사인가?” 미지근했던 그분의 음성이 차츰 따뜻해졌다. “미래신문입니다….” 이제는 표정까지 밝아지셨다. “그런데… 인턴………입니다…. 하지만 곧 정식 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낯빛과 목소리는 제자리를 되찾았다. 딸을 한번 휙 돌아보셨다. 당분간 지켜보겠노라 말씀하셨다. 혼처가 여기저기서 들어온다는 말씀까진 하지 않으셨다. “우리 딸 정도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분의 입가엔 여유로운 웃음이 만면하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로써, 아끼는 여식을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버렸음을 알진 못하는 듯했다.
22 창밖은 장맛비로 축축했다. 대기의 잔열은 습기를 머금고도 식을 줄 몰랐다. 눅눅한 하늘이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먹구름 낮게 깔린 하늘은 성급히 아슴푸레해졌다. 우산 쓴 행인들은 지루한 공기를 뚫고 제 각기 가야할 길을 열심히 걷고 있었다. 이따금 가로수가 바람에 술렁일 때마다 빗물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녀도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푹신한 쿠션을 가슴팍에 안고서 따뜻한 커피 잔을 감싸 쥔 채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 편해 보였다. 카페 안의 사람들은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일상의 안락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반쯤 눕다시피 소파 깊숙이 허리를 들이밀었다. 저들을 흉내내보기라도 하는 듯 편안한 표정도 지어 보았다. 그녀는 내 표정에 안심하고서 계속 창밖을 관찰하고 있었다. 내 앞에 놓인 아이스 카페모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멀건 휘핑크림이 다 녹아 흙탕물처럼 더러워 보였다. 얼음은 금세 녹고 있었다. 얼음은 차츰 사라지면서 아지랑이 같은 실을 흐물흐물 뽑아내고 있었다. 나는 멍한 눈길로 그 실타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겨웠던지 무어라 말을 하는 듯했다. 나는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그녀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난청을 앓는 사람처럼 귓전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럴수록 그녀는 아마 더 큰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입에 소음기를 단 사람처럼 입만 뻥긋하는 것 같았다. 문득 이틀 전의 꿈이 생각났다. 지금 내 앞엔 그 꿈속에서처럼 끝없는 갈림길이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막막함. 그러나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꿈이지 않은가. 또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남들도 다 그렇게 살면서, 저렇게 쉬면서, 내일을 또 그렇게 살아가질 않는가. 나는 소파의 푹신한 편안함을 더욱 만끽하고 싶었다. 그럴수록 엉덩이를 더 앞쪽으로 빼고, 허리를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꿈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만큼 헛된 것이 또 있을까. 왜 자꾸 불쾌한 꿈을 떠올리는 것일까. 꿈은 아무리 흉해도 꿈일 뿐인데. 그런 점에서 꿈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닮은 데가 있었다. 그가 어찌 살았든 어찌 죽었든 그는 죽었을 따름이니까. 나는 더는 꿈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담배를 몇 시간이나 참은 골초마냥 갑갑함을 느끼는 것일까. 어째서 카페의 조용함에, 안온함에, 저들의 행복한 표정에 까닭모를 적개심을 품고 있단 말인가. 왜 저들은 늘 즐거워 보이냔 말이다. 정말 즐거울까.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걸까. 다가가서 멱살이라도 흔들고 싶었다. 대체 웃음의 비결이 뭐요? 당신은 어째서 그리도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까! 살 만합니까!
23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사랑 받고 있지요……’ 전화가 울린다. 상규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전화가 끊기기 전에 간신히 받았다. “뭐해?” “커피숍이야. 여자친구랑 있어.”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자. 우진이도 온대.” 도미노처럼 취직한 친구들은 차례차례 한턱내곤 했다. 오늘은 상규 차례다. 상규는 여러모로 담임과 닮은 친구였다. 비록 거칠 때도 있으나 그의 인간적인 따뜻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때론 그 배려와 관심이 내게 가벼운 모욕으로 느껴지곤 했지만, 그래도 상규는 좋은 친구다. 상규는 새로 뽑은 2,000cc 세단을 끌고 나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악수를 청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작은아버지들이 내게 그러듯이. 나는 이런 식의 인사를 어색해 했다. 샹송 그룹에 입사한 지 두 달여, 그는 어느새 어른이 돼 있는 듯했다. “들어가자.” 상규는 거침이 없었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려니 했다. 새 차를 과시하는 날, 남자들은 종종 그럴 수 있으니까. 더욱이 상규는 이제 샹송 그룹의 패밀리니까.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상규가 여태껏 고생했던 걸 감안하면 그는 잠시 우쭐해져도 괜찮으리라. 우진은 부쩍 말수가 줄어있었다. 내가 말을 걸어도, 상규가 말을 걸 때도 ‘어’, ‘아니’, ‘그냥’이라고 짤막하게 대꾸하는 게 고작이었다. 우진은 말없이 고기만 뒤집었다. 내가 식당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침묵을 견뎌낼 때, 갈증이 나지 않음에도 자꾸 물만 홀짝홀짝 마시듯이. 불판을 계속 신경 써야 했기에 우진의 시선은 편안해 보였다. 내가 아버지 대신 계속 물병만 쳐다보듯이. 상규는 빠른 속도로 취해갔다. 술이 들어갈수록 상규는 말이 더 많아졌다. “모두가 힘든 세상이잖아.” 상규가 고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대답했다. 우진은 고기만 굽고 있었다. “넌 정규직 전환 안 되면 어떻게 살아간 건데?” “…….” 상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냥 하반기 준비하라니까. 하반기에는 채용규모가 늘어난다니까 기대해볼 만하잖아. 넌 그래도 스펙도 좋은 편이고….” 상규는 우진이를 힐끗 보며 말했다. 스펙이라…. 그래 난 몇 점짜리 인간이냐? 상규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네가 보기에 난 몇 점이냐. 샹송 그룹에 들어간 네 눈에는 내가 얼마짜리로 보이느냔 말이다! 그러나 물어볼 수 없었다. “다닐 만해?” 그는 높은 단 위에 올라선 채 말을 하는 듯했다. “응…. 그냥 그렇지 뭐….” “우진이는 시험 준비 잘돼?” “…그냥, 뭐…….” 우진이는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2,000cc나 들이키며 비슷한 대답만 했다. 그 순간, 상규의 얼굴에 언제 한 번 본 듯한 가벼운 유쾌함이 재빨리 스쳤다. “우리 열심히 살자. 최선을 다해도 살아남을까 말까한 세상이잖아.” 살아남을까 말까…. 그렇군…. 2,000cc 자동차를 뽑은 상규는 풍요와 불안의 야누스 같아 보였다.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 상규는 자신이 이룩한 거탑의 층층을 이야기 하곤 했다. 그는 탑의 1층에 4.4의 학점을 깔고, 2층에는 990점의 토익을 올리고, 3층에는 어학연수를, 꼭대기에는 인턴 경력과 봉사활동을 얹어두었노라 떠들었었다. 다만, 모든 사물에는 기초가 중요한데 학벌이라는 기초가 빈약하여 그 점을 불만스러워 했다. 그럴수록 그는 그 약하다는 기초 위에 더 높고 화려한 탑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풍요와 불안. 스펙의 과잉이 주는 풍요, 그러나 그것조차 부족하다는 불안. 그때 상규의 떨리던 표정이 지금 재현되고 있다. 상규의 불안. 상규의 학자금 대출 누적금액은 2,500만원이 조금 넘었었다. 그는 일용직 노동, 과외 선생, 웨딩홀 서빙, 학원 강사로 활약해야 했다. 대학생이 됐으니까 나도 알바란 걸 해 보고 싶어. 1학년 때 우진이가 말했었다. 그래, 우리도 한번 해보자. 뭐가 좋을까? 내가 신나서 말했다. 옆에 있던 상규는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졸업이 가까워올수록 우진은 무너져갔다. 그는 난데없는 자기혐오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었다. 인생을 헛살았다, 잘못 살아왔다, 못난 놈이다……. 나는 옆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지긋지긋하게 그 소리를 들어주어야 했다. 우진은 상규를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상규가 지나치게 경쟁지향적이며, 속물적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까지 험담했다. 인생을 헛살았다, 잘못 살아왔다, 못난 놈이다……. 우진의 어두운 자의식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규의 눈으로 바라볼 때의 우진이었다. 우진은 어느새 상규의 눈으로 자신을 관조하며 평가하고 있었다. 상규가 그릇된 인생을 살아온 게 아니듯 우진 역시 분명 그랬다. 우진은 등록금이나 생활비 걱정이 없었음에도 친구들을 위해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하곤 했다. 그는 학점이 잘 나온다는 수업보다는 듣고 싶은 수업을 골라들었다. 그런 수업이라면 타과 전공수업까지 수강신청 했다. 덕분에 그의 학점은 엉망이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캠퍼스는 차차 차가워졌다. 나는 차라리 이대로 얼어붙어 학교의 붙박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차가운 학교는 내 등을 떠밀어 교문 밖으로 내보냈다. 학교 너머는 눈으로만 보던 세계였다. 입으로만 욕하던 세계였다. 마침내 캠퍼스가 꽃다발로 가득해지던 날, 나는 벌레처럼 작아져 꽃잎 속으로 숨고 싶었다. 나는 전혀 대단할 것도 없는 위인이면서도 인생을 실험적으로 살아왔다. 욕망이 갈라진 자, 욕망 앞에 정직하지 못한 자, 그렇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허랑방탕하는 자, 하는 일 없이 허송세월하는 자, 그럼에도 뭔가 하고 있노라 착각하는 자. 난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 나는 수없는 분열을 거듭하였다. 담임을 경멸하면서도 교실을 떠나지는 못하였고, 교실을 박차고 나오지 못함에도 담임을 끊임없이 저주하였다. 상규를 무시하면서도 그의 입장을 존중하였고, 우진을 답답해하면서도 그의 투정을 부정하지 못했다. 인생을 실험적으로 사는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분리된 의지는 집중력을 잃는다. 갈라진 의욕은 파괴력이 줄어든다. 하나의 육체에 하나의 욕망이어야 한다. 하나의 인간에 하나의 의지다. 머리 두 개 달린 뱀은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다. 방황해선 안 된다. 결코 비틀거려서도 안 된다. 갈 지(之) 자 걸음을 걷는 자는 결국 엎어져 코가 깨진다. 그러니 늘 집중해야 한다. 한 우물만 파라. 단 하나만 생각하라. 담임은 말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합니다. 구원을 찾던 파우스트는 말하였다. 나는 담임의 말을 부정하고 살았다. 아직 방황하는 인간이라면, 어쩌면 그는 여전히 노력중일 수도 있다 위안했었다. 지금 나는 그 징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우진이가 걱정이야. 걔도 빨리 잘 풀려야 할 텐데.” 먼저 자리를 뜬 우진을 걱정하던 상규의 얼굴에 익숙한 번뇌가 번졌다. 그것은 타인의 불행을 확인할 때에 종종 나타나는 일종의 유쾌한 고뇌였다. 그 표정은 동시에 나를 향하는 듯했다.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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