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의 종교 관련한 얘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나는 1954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오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탄신일을 맞아 제등행렬을 할 무렵에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던 겁니다.
이렇게 나는 부처님의 은덕(?)으로 세상에 나왔으나, 불교는 물론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고 30대까지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내가 처음 기독교를 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무렵인 것 같습니다.
그때 나는 장애인 보호 시설인 “평화의 집”이란 시설에 부원장으로 일을 봐주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집은 우리 협회의 상담 부장 이였던 고, 임득선님이 설립한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로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운영되는 작업장이고, 보호 시설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앞에서도 얘기하였듯이 신앙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평화의집이 기독교 신앙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보니 부원장이었던 나 역시 하나님을 아는 척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 평화의 집은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 고개에 있었고,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 교회였습니다.
순복음교회는 그때까지는 장애인들을 맡아 가르치는 교구가 없었기 때문에 청년교구에서 우리를 맡아 예배를 인도하려 담당 전도사가 오셨는데, 그때 오셨던 분이 ‘성정차’전도사님이 였습니다.
이렇게 순 복음교회와 인연을 맺은 우리는 여의도로 고난(?)에 예배를 드리려 다녔는데, 특히 철야예배 때에는 당시 차량도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버스를 타고 성남 시에서 여의도 순복음 까지 매주 철야 예배를 가야 했습니다.
원장님이 계실 때에는 내가 별로 나서지 않아도 되었지만, 원장님이 행사로 인해 자리를 비울 때면 내가 가기 싫어하는 우리 가족들을 인솔하고 가야만 했는데 비록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신앙이 부족한 내가 그들을 설득하고 인솔하여 교회 가기까지는 보통 어려운 일 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차량도 없이 철야 예배를 드리고 나면 새벽 2시가 채 안되는 시간이라 우리는 차가 다시 다니기 시작하는 새벽까지 교회 예배당에서 담요들을 둘둘말아 쭈그리고 앉아 첫 차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빛을 발하여, 교회의 지원으로 평화의 집 소속의 3인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국 휠체어 종단을 하게 되였는데,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도착하는 시간에 당 회장이신 ‘조용기’목사님이 직접 나오셔서 환영과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행사를 계기로 순복음교회에는 장애인 교구가 처음 설립이 되였고, 후일 “세계장애인선교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였다.
하지만 그 때도 내 신앙은 크리스찬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잊지 못했으며 원의 가족들은 나를 ‘대왕마귀’라 불렀습니다.
그런 나를 우리 고, 임득선 원장님은 좋은 말씀으로, 때로는 실천하는 행동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전달하느라 애쓰셨습니다.
그러다가 평화의 집이 성남시에서 대전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무렵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준 사람은 우리 협회의 회원 이였던 모순애 씨와 그의 남편 고, 박 종휘 부부였습니다.
특히 박 집사는 나를 교회로 인도하느라 정성을 다하였고, 그동안 평화의 집의 소속으로 인해 교회는 자주 나가긴 하였지만, 그에 정성으로 인해 나는 개인적으로는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구로동에 있는 “경일교회”인데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날이 되면 박 집사는 우리 집으로 와서 나를 휠체어에 태워 도보로 교회까지 걸어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리 크지 않은 교회였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등 편의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박집사는 나를 업고, 2층의 예배당까지 걸어서 올라가곤 하였고, 자리에 한번 앉으면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거의 나가야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 다니기 시작한 나는 모순애 고, 박종휘 부부에 변함없는 헌신으로 교회에 출석하면서 점점 크리스찬으로서의 모습을 부족하나마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 후 부터, 내가 교회에 나가면 교회 청년들이 나를 업어서 예배당 자리에 앉혀주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다니던 나는 우리 청년들이 나이가 들어가고 따라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보니 그들에게 엎드려 예배당으로 올라가야 하는 불편이 참기 어려워 나는 목사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편의시설이 있는 교외로 나갈 테니 양해를 해달라고 말씀을 하였고 그 이후 우리 구로동에서 가장 큰 교회에 속했던 배** 교회로 옮겨서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큰 교회로 옮기고 보니 여러 가지로 교회의 분위기가 다른 점이 많아 불편하였고 정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씩 주일을 지키지 않는 일들이 자주 있었고 그러던 중 나와 함께 장애문화예술계에서 종사하시던 문화교류협회 최공열 이사장님의 안내를 받아서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늘푸른교회”로 나가게 되였습니다.
늘푸른교회는 그렇게 큰 교회는 아니지만 그 교회 장로님 이신 최공열 이사장님의 주도로 인해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고 장애인들을 대하는 목사님과 교인들의 태도 역시 나를 그 교회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나를 교회로 인도하였던 최 이사장님은 그 다음 주 부터 정해져 있던 일정으로 인해 한달 넘게 미국에 가 계시느라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한번 나갔다가 안가는 것은 나를 인도하는 사람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먹서먹한 마음을 누르고, 교회에 나갔고, 오늘날 까지 늘푸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최공열 이사장님의 신앙에 깊이 였습니다
최공렬 이사장님은 아버지부터 절대적인 기독교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최연소와 최장기 장로를 지낸 오로지 믿음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정말 기독교 신앙에 본이 되는 분이구나, 느끼게 되였습니다.
일터와 사회생활은 물론 자녀의 양육까지 오로지 기독교 신앙으로 자녀를 훈육하고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모습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세와 함께 진정한 믿음으로 생활을 하면 매사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였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기까지 나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었던, 돌아가신 임득선 원장님을 필두로 하여 나를 교회로 이끌어 주었던 고,박종휘 집사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를 알게 하고, 신앙인의 자세를 몸소 보여주신 최공열 장로님으로 인해 비로소 내가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계기와 힘이 되었기에 다시 한번 이 기회를 빌어 나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해준 고 인득선님, 고, 박종휘님, 최공열 장로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장애인들은 여러 면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데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 했듯이 나는 부처님의 은덕(?)을 빌어 세상에 태어났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 신체에 핸디캡으로 인한 어려움들을 우리 주님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일찍이 나는 내 몸을 의학기관에 전신 기증하였고, 그 기증기관이 카톨릭 기관인 관계로 본의 아니게 부처님과, 예수님,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사는 일생이 되었지만 이 또한 나름 괜찮은 생이고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까지도 내 신앙은 미완성 상태이고, 부족함이 많지만 주님의 사랑에 깊이를 좀 더 알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지만, 지금까지 나의 자세는 우리 장애인들을 위한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봉사를 하지 못해, 주님께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 점도 이해하여 주실 것이라고 내 나름 변명을 대어 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하고 싶은 일은 주위 사람들과 선교단을 만들어 음악과 찬양으로 우리 하나님의 큰 사랑을 전하는 일을 내 마지막 과업으로 삼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평화의 집에 있을 때 우리 식구들로 선교팀을 만들어 시골의 작은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선교하고, 찬양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가 지금도 내 기억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