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위원장, 김한규 실무부위원장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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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애인인식개선신문) 우리나라가 분단의 아픔과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딛고,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 신화를 이루어 냄으로써 스포츠를 통해 인류평화에 이바지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서울올림픽과 동반 개최된 제8회 서울패럴림픽은 전 세계 장애인은 물론 우리 국내의 장애인복지를 몇 십 년 발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으며, 장애인들에게도 재활 의욕과 용기와 희망을 준 대회 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개최된 패럴림픽이었다.
그 중심에서 조직위 실무부위원장을 역임한 김한규(21세기 한·중 교류협회 회장) 부위원장을 찾아 당시의 어려운 여건들을 어떻게 뚫고 성공의 감동을 엮어 냈는지 들어 보았다.
현재도 21세기 한·중 교류협회 회장으로 민간외교 최일선에서 역사의 페이지를 매일 한 장씩 담아서 남기는 김 회장을 시청 주변에 소재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한규 88서울 장애인 올림픽 (패럴림픽)실무부위원장 집무실 서 (사진 = 최봉혁기자)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Q 88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서울패럴림픽)이 우리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중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말씀해주세요
A
패럴림픽 역사상 최대 규모인 61개국 4,301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최초의 성공적인 대회였다. '도전과 극복 · 평화와 우정 · 참여와 평등'을 대회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우정 어린 대회 · 검소한 대회 · 특성 있는 대회'라는 3대 목표를 차질 없이 성실하게 수행했다.
우리나라 경제적 상황이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직위원회 모든 임직원이 대한민국을선진국 도약대로 만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성공적인 대회를 개최하여 내 생애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Q 생애 보람된 일로 기억하고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A
88년 이전의 우리나라 장애인복지 수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깨어있지 못했고, 장애인이 마음 놓고 밖으로 나다닐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방법은 서울올림픽대회의 인력, 물자, 시설을 연계해서 지원받는 방법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회 준비 초반에는 서울올림픽 조직위(SLOOC)가 서울패럴림픽조직위(SPOC) 직원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고 SLOOC 박세직 위원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내 역할이 생겼다.
박 위원장과 나는 양 대회를 함께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국제장애인 스포츠 기구의 관계자들이 점검차 우리 SPOC를 찾아오면 그들에게 서울올림픽의 경기장을 비롯한 모든 준비사항이 동반 개최함으로써 완벽하게 성공 개최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여줬다.
결과는 당연히 패럴림픽 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Q 패럴림픽의 성공으로 장애인 복지발전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었다. 장애인 인식개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서울패럴림픽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평생 보지 못한 감동 드라마를 보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몇 십 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장애인 자신도 외국 선수들의 당당하고 즐겁게 인생을 산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요,
패럴림픽이 끝나고 나서 장애인복지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죠, 장애 당사자주의가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변화의 시기를 갖게 됐다.
나도 88 대회가 끝난 이듬해인 1989년 12월에 여당인 민주정의당소속 국회보사위원(간사)으로서 장애당사자들의 요구에 의해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해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Q ‘88 대회 실무부위원장으로 부임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패럴림픽 이전 1981년 홀트아동복지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에는 전쟁고아들이 많았고,사회적으로 가정 내 지적장애·자폐성 장애 등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의 수용 보호 시설인 경기도의 '홀트일산원'을, 인간의 존엄과 사랑이 보장된 관리와 자립 홈으로 조성을 시작했다.
소비적 존재에서 생산적 일꾼으로 전환 시키는 직업재활관과 서울패럴림픽 보조경기장인 홀트 체육관까지 겸비해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의 사회적변화의 역할에 일조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장애인 복지마을인 '홀트일산복지타운'이다.
장애인에 대한 공평한 기회 제공과 이동 편의권의 제도적 변화와 장애 인식개선의 발전이 바로 서울패럴림픽이 계기가 돼 앞당기게 됐다고 생각한다.
또한, 서울패럴림픽 개최 직전인 1988년 9월부터 재활복지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을 설치 운영했다.
1992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고, 30여 년이 넘게 장애인 복지정책을 비롯한 사회복지를 선도하는 연구기관이 됐다.
Q 한 중수교와 21세기 한중 교류협회 설립에 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중국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86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 경험이 있는 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시아경기대회 진행에 필요한 컴퓨터 프로그램, 자동차, 복사기 같은 것을 협조해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이 있어 한국정부는 이를 흔쾌히 들어주자 중국이 음수사원의 마음으로 양국 수교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서울패럴림픽 조직위(SPOC) 실무부위원장으로서 국회올림픽 특위 위원장(간사 겸임)이었던 내가 양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가교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생의 보람이며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다.
여기까지 인터뷰에 응해주신 김한규 부위원장은 현재 21세기 한중 교류협회 회장으로서 앞으로도 중국과의 관계에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김한규 회장은 그동안 총무처 장관, 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한국지원단장을 맡아 중국 고위 인사들과 교류한 것을 계기로 '자타 공인 중국통'이 됐다
21C 한중 교류협회는 2000년 10월 17일 주룽지 당시 총리의 한국 국빈방문 계기로 창립됐다. 중국 측 파트너는 인민외교학회, 국무원신문판공실, 송경령기금회등과 교류협력을 위한 행사를 개최해왔다.
21C 한중 교류협회는 2000년 10월 17일 주룽지 당시 총리의 한국 국빈방문 계기로 창립됐다. 중국 측 파트너는 인민외교학회, 국무원신문판공실, 송경령기금회등과 교류협력을 위한 행사를 개최해왔다.
한편 88패럴림픽의 역사를 재조명해 출판을 앞두고 있는 "어둠을 뚫고 새벽을 열다" 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현재는 21세기한중교류협회 회장,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