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13> 독대
<13> 독대
나는 탄에게 일부러 길을 돌아 한성으로 갈 것을 명했다. ― 익히지 않아도 되는 길이니 너는 편하게 가라. 두 번은 가지 못할 길이었으니 새로 밝히는 길목을 구태여 눈에 담지 말라고 전했다. 탄이 나의 뜻을 알아 강화로 말을 이끌었다. 유배된 다음 해, 대군은 결국 강화에서 망인이 되었다. 나는 3년 만에 그 고을에 닿아 뒤늦은 인사를 올렸다. 읍 안의 뜻 있는 자들이 노신이 옴을 알고 맞아주었기에 그들에게 물어 대군의 마지막을 듣게 되었다. 강화 부사 기협은 대군을 맞아 그를 남몰래 비호하였고 음식 또한 모자람 없이 올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후 새로 도임한 부사 정항은 서서히 대군의 곡기를 끊어 기력을 잃게 하였다. 읍 안의 하급 관리 하나가 밥을 품고는 위리를 넘어 간신히 대군을 먹였으나, 정항이 이를 알고 장을 쳐 관리를 내쫓았다. 대군의 기력이 다할 때쯤, 정항은 위리로 둘러싸인 초가에 불을 아주 뜨겁게 때었다. 하여 아홉의 손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버티다가 결국 몸이 아래로 떨어지니, 대군의 사인은 증살(蒸殺)이었던 것이다. 임금은 대군의 죽음에 장례와 제전을 후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러나 신들은 역적의 장례를 관이 돕는 것은 공론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받들 수 없다고 아뢰었다. 이 이야기는 한성의 담을 넘어 곳곳의 향에 퍼졌다. 그때까지도 궐에서는 아홉 먹은 역적을 두고 예로 씨름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이 나라의 예라는 것이 얼마나 가난한 것인지를 두고 크게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임금이 아우에게 마지막 의를 베푸니, 결국 장례는 대군의 예로 치러졌다. 개중에 진실로 슬퍼하는 자가 궐에도 남아 있었을 것이나 비애를 크게 표하는 이는 없었다. 벼슬아치들이 그러했고 사내들이 그러했다. 목 놓아 우는 자는 대비전의 나인들뿐이었다. 궐에서는 오직 아녀자들만이 그 의(義)가 가난하지 않았다. 이이첨과 대북은 서서히 다음을 준비했다. 궐내에 이윽고 폐모론이 일었다. 나아가 대북은 집요하게 대비의 사사를 요구하였다. 임금도 또 한 번의 패륜을 두고 이를 고심하는 듯 오래도록 시간을 끌었다. 대비의 사사로 이루어질 것은 많았다. 그를 허하면, 교하 천도와 화기도감 확충, 대동법 확대와 같이 임금이 꿈꿔온 개혁이 비로소 이루어질 것은 선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움직여야 했다. 벗은 잃었으나 굳은 몸이 나았고, 못한 인사를 올렸다. 또한 갈 길은 오직 하나로 남았으니, 나는 강화에서 말을 돌려 다시 한성으로 향했다.
나의 돌아옴을 알고 오래지 않아 임금이 노신을 불렀다. 앞날에 비해 몸이 훨씬 나았으나 여전히 무거웠다. 그러나 군왕의 처소에 두 발로 나아가기에는 그 힘이 부족하지 않았다. 좌부승지 권상협이 친히 나를 마중하였다. 나는 그를 따라, 임금과의 독대를 위해 편전으로 나아갔다.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나는 걸으며, 밤과 추위를 잊고 거적 위에 앉아 있는 무리들을 스쳐지나갔다. 구태여 눈은 주지 않았으나, 폐모를 막고자 하는 그 얼굴들 중에 젊은 날의 한음이 앉아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 스쳐지나가 안으로 들었다. 이제 좌부승지는 몸을 멈추고 노신은 홀로 걸어 문을 넘으니, 저 끝에서 임금이 보였다. 나는 예를 살펴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그리고 다시 그를 보았다. 한음이 택한 군왕의 용안을 보았다. 나는 망자가 된 벗님의 죽음을, 옥좌에 앉아 있는 군왕의 육신에 포개었다. 저 육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참으로 멀고 지난하다. ― 대비의 숨을…… 보전하여 주소서, 전하. 감히 신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병이 많이 나아졌다 들었소. 옥좌에 앉은 임금이 나의 안색을 살폈다. ― 한음은 스스로의 죽음으로, 전하의 죽임에 힘을 보탠 것입니다. ― ……. ― 앞날에 전하께서 혈육에게 행하신 죽임을…… 한음이 기어코 산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 경의 몸이 나아 친히 걸어오니 내 마음이 훨씬 편하오. 나와 임금은 맞물리지 않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 한음과 저의 뜻을 받아주시어, 부디 어미를 살려주소서. 다른 죽음을 보태야만 비로소 정당해지는 죽음도 있는 것이었다. 한음의 죽음은 오늘로는 임금이 이이첨과 대북을 아주 얻게 하는 일이었고. 훗날로는 망인이 된 대군에게 정적이라는 존재성을 더욱 완전하게 부여하는 일이었다. 적자라는 혈통과 소북이라는 세. 그리고 유영경, 김제남, 신흠…… 정협, 박동량, 한준겸…… 그 무수한 이름들에 이어 당대 영의정이라는 자신의 직과 이름까지 한음이 보태었다면 말이다. 임금이 아우의 숨을 앗는 일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을 죽였으니, 어미를 죽이는 데는 더 쓰일 목숨을 없게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 어미의 숨만은 앗지 마소서, 전하. ― 경이 다시 일어나 걸으니 지난 앞날이 보이는 것만 같구려. 맞물리지 않던 말들은 군왕이 앞날을 생각함에서 비로소 서로 언어가 되었다. ― 우리는 모두 걸었던 사람들이오. 제가 가진 다른 이름 뒤에 숨어 도망하지 않고, 삼남 땅을 걸었소. 하여 나라를 구하고, 함께 사직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 임금은 옥좌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 나는 비겁하게 북으로 수레만 끌지 않았소. 내 두 발로 이 나라 땅을 딛고 걸었단 말이오. 경도 알지 않는가. 왜란 때 우리가 사지에 함께 있었소. 걸어오던 임금이 나를 스쳐 지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 한데, 적서와 편당…… 국난과 정쟁…… 내 발을 막던 것이 참으로 많았소. 선왕도 마찬가지였지. 나는 선왕이 내 얼굴에 던진 검은 수의를 사양 않고 덮어 썼으니 삼남 땅에서 눈 없는 자가 되어 싸운 격이요. 맹인에겐 사방(四方)이라 할 것이 없었소. 다만 앞이 있을 뿐이었소만. ― 전하, 부디…… 어미를 살리소서. 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 그런 내가 살아남았는데, 살아 군왕이 되었는데 내 가야 할 길이 오직 앞이 아니었다면 또 어디였겠소. 나아가기 위해 뿌리쳐야 했소. 내 사람이라도, 내 혈육이라도. 내 등을 지난 임금은 편전을 계속 걸으며 말을 이었다. 걸음이 끝에 다다라 문 앞에 이르니, 그가 다시 몸을 돌려 내게 향해오는 소리를 내었다. 한 발씩 붉은 용포의 앞자락을 스치는 걸음은 무거우며 빠르지 않았다. 앞날을 말하던 임금이 몸을 돌리니, 나는 그의 말이 비로소 끝을 향해 오고 있음을 느꼈다. ― 한데 이제 본래 내 몸이고 발이던 것이 나를 걷지 못하게 하는구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의 끝을 기다렸다. ― 오랜 살이 아프게 굳어 걷지를 못하니 이를 어떡해야 하오. 이를 어찌해야 하오. 노신이여, 대답해주오. 바람 소리가 궐의 몸피를 지나 현을 켰다. 풍현(風絃)이 창호를 뚫고 들어섰다. 임금의 입에서 꺼내진 흑백의 시간들이 적요를 깨었다. 그것들이 달무리처럼 흐려져 눈앞에 그려질 듯하였다. 밖의 거적들이 내는 소리는 불어오는 것에 맞물려 더욱 스산하게 울렸다. 나의 굳은 노구 위로 겨울의 냉기가 올라섰다. 이제 노신이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 베어내소서, 전하. 굳은살을 베어내시어…… 길에 나아가소서. 나는 흐린 것을 지워내고, 임금 앞을 밝게 하였다. 이제 그가 아주 나의 앞에 섰다. ― 우리, 정말이지…… 정말 최선을 다하였소. 그렇지 아니한가. 임금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숙였다. ― 경의 말을…… 따르리다. 임금이 죄인의 뜻을 알아 눈을 붉히니, 그날 겨울밤은 달무리가 짙어 유독 흐리고 추웠다. 정사년 12월의 일이었다.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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