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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12> 염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기사입력 2023/02/28 [18:01]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12> 염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입력 : 2023/02/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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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 젖가슴 1     ©장애인인식개선신문

 

<12>

 

 

 

나의 향 산천의 기가 내 숨에 깃드니 차츰 굳은 것이 풀어져 몸이 조금 나았다.

하여 나는 갈 수 있었다. 내 벗의 마지막 자리로.

대감, 이리 와주시니…….

밤을 잊고 온 내가 상가(喪家)에 들자, 한음의 아들 여규는 잠시 예를 잊은 듯 달려와 나를 크게 반겨주었다.

보내는 일을 내 친히 하고 싶네. 허하여 줄 수 있겠는가.

조용히 치르고자…… 곡비(哭婢)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는 상을 당하면 값을 치르고, 대신 울어줄 곡비를 잘 쓰곤 하였다.

그 소리가 크고 애절한 만큼이 곧 그 집안의 권세였다. 돈 있는 양인도 곡비를 불렀으니 양반만 그를 쓰는 일이 없었고, 아끼는 말이 죽어도 곡비를 찾았으니 사람에게만 쓰는 일이 없었다.

한데 집안의 어른이, 나라의 재상이 죽었는데 곡비 하나 쓰지 않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한음의 뜻이었을 것이다. 여규에게 따로 묻지 않았으나, 나는 한음이 살아생전 자식에게 몇 번이고 말하였을 제 마지막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허나 염은 따로 이끌어주는 자가 있는 법이니, 어쩔 수 없이 쓰려고 하였는데…… 이리 대감께서 오셨으니…….

이미 상가에서 불러놓은 늙은 염장이가 따로 있었으나, 상주 여규가 나의 청을 받아주어 내가 대신 한음의 염을 하게 되었다.

염의 첫 과정은 습()이었다. 역할을 내게 미뤄준 노인은 상가를 뜨지 않고 나의 옆에서 절차를 하나씩 찬찬히 알려주었다. 그의 말을 따라, 한음의 시신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마른 다리를 훑어 내리며 아래를 보는데 망자의 발 두 쪽이 모두 엄지발톱이 빠져 크게 상해 있었다. 노년에 상하여 그리 된 것인지, 앞날에 청원으로 먼 길 갈 때 그리 된 것인지 닦으며 짚어 보았다. 허나 시기를 헤아리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같은 해 입직하여 그간 걸어온 발길을, 남은 벗은 그저 이렇게 마음으로나마 닦고 고쳐 보는 것이었다.

한음에게 새 옷을 고쳐 입힌 뒤 얼굴을 바라보았다. 죽음은 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이다. 죽어 눈 감은 벗을 보니 그 모습이 퍽 생경하였고, 전에 없던 감정이 가슴에 들어앉았다. 하여 늙은 입에서 말이 계속 나와 밤이 깊도록 나는 마치 익히 해본 듯이 염담(殮談)을 하였다. 혼잣말이면서 또 혼잣말이 아니었기에 그 꼴이 앞날 조정에서의 우리 둘 모습과 아주 같았다.

나의 옆에서 여규는 줄곧 곧은 자세로 첫날의 염을 함께했다.

왜란 때 도망 못 한 어미는 자식을 종에게 맡긴 뒤 자결하였고, 아비는 군왕을 위해 스스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부모가 모두 뜻 있는 죽음을 맞았기에 이 상가가 장례를 치르는 가풍은 사뭇 달랐다.

어린것들도, 종들도 쉬이 슬픔을 뱉지 않으니, 밖에 찾아온 객들 또한 더욱 숙연해져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이 사람아, 아우야. 내심 서운하지는 않았나.

오직 한음과 염담을 나누는 나의 목소리만이 선명하였다.

진짜로 막지 않아 서운하진 않았나 말일세.

저의 탄핵도, 유배도 막지 말라던 한음의 말을 생각하였다. 포천으로 떠나기 전날 벗이 내게 찾아와 나눈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마지막 말은 아마 이것이었다.

그래도 큰 신하 중에 대비를 살릴 사람이 하나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 말을 곱씹으니 지금 내 앞에 있는 벗이, 죽어서도 익살로 농을 던지는 듯하였다.

내 결심을 잘 반대치 않아 형이 살았으니 이제 형은 잘 죽어야 하오. 너무 이르지 않게 늦지도 않게 아주 잘 죽어야 하오, .

 

 

너는 어찌 늘 넘치기만 하느냐.

둘째 날 밤, 소렴(小殮)을 마치고 쉬는데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운 마음으로 한 일이라도, 상가에서는 객이 지켜야 하는 법도가 있는 것이다. 나서지 않고 조용히 일을 도와야 마땅했다. 경솔하였다.

탄의 목소리였다. 탄이 상가 뒤편 도린곁에서 달 아래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녀석이 누군가를 나무라는 소리를 내기에 다시 살피니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낮고 야윈 어깨 하나가 아래로 축 쳐져 있었다.

……대감.

탄이 내가 옴을 알고 예를 살피니, 뒤돌아보는 어린것과 내 눈이 마주쳤다.

어찌 꾸짖느냐.

한이 일을 돕는데…… 그만 포천의 것을 들고 와 예를 잃게 되었습니다.

탄이 내게 일의 사정을 설명했다.

탄은 내 몸을 살피고, 상가의 손을 돕기 위해 종아이들을 함께 꾸려 조문길에 올랐다. 함께 따라온 한이 포천에서 느타리를 챙겨 들고 왔는데, 누구도 이를 살피지 못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염하는 사이 부엌일을 돕게 된 한은 그만 망인의 집에서 느타리를 얹은 밥을 지어버렸다. 상가의 행랑아범이 뒤늦게 이를 알았으나, 먼 곳에서 온 걸음들을 오래 주리게 할 수 없어 그대로 느타리밥을 상에 올렸다고 하였다.

상주 어른께서는 외려 그 밥이 맛이 깊고 속을 따숩게 하여 객들이 만족하였다 하셨습니다. 하여 더욱 큰 잘못이 되었습니다. 살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대감.

탄은 상주 여규가 되레 나의 종들을 달래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갓집의 밥맛이 좋은 것은 바른 일이 될 수 없었다. 예라는 것이 그러했다.

나는 좀 걸어야겠구나. 걸으며, 내가 마저 꾸중하겠다.

염이 길어 뭉치게 된 몸을 풀어야 했다. 나는 한을 시켜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였다.

허면…… 멀리서 따르겠습니다.

되었다. 향에 온 뒤 많이 나아지지 않았느냐. 허니 이리 염도 할 수 있던 게지. 걱정 놓아라.

녀석을 물렸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상가의 뒤편으로 난 호젓한 길을 천천히 걸었다. 야밤이었고 풀 내음이 좋았다. 옆에 한이 함께하였다.

어찌 느타리를 올렸느냐.

소녀는 그저…… 살아서 먹는 일만 중한 걸로 알기에…….

어린것의 답이 어여뻐 내가 웃었다.

차고 젖은 곳이면 어디에든 있어 쉬이 살고, 또 질기고 억세어 쉬이 죽지 않는 그것이 한에게는 산 것이었을 것이다. 느타리는 어린것이 몸으로 익힌 생(), 그 자체였다. 녀석은 죽은 집에 산 것을 주려 한 것이다.

나는 조금 더 걷다가 멈추어 주변에 키가 높은 바위에 앉았다.

잠시 쉬어가자.

녀석을 함께 앉힌 자리 앞에서 나는 지팡이로 모래를 긁어 글 한 자를 썼다.

혹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나의 물음에 녀석은 달빛에 비친 글을 살피더니 이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사는 민초 앞에 선비의 글월이라는 게 헛된 거짓이었다.

내 평생 해온 일이 네가 한 끼 지어 먹이는 일만 못하구나. 잘하였다. 잘한 일이다.

나는 내 눈에 들어와 그간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모두 털어내기로 하였다. 모래 위에 쓴 그 한 자를 흩트려 지워버렸다.

뜻이란 거짓이 아닌 참으로 써야 함이 마땅했다. 앞서 포천에서 상소가 써지지 않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이만 돌아가자.

발길을 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는 바위 뒤편 수풀 위로 던져버렸다. 문인이 붓을 놓는다는 것은 다음의 길이 명징해지는 일이다. 하여 나는 글이 아닌 나의 몸을 들고 용상 앞에 가기로 그날 작심하였다.

대감, 지팡이는 어찌하여…….

놀라 묻는 한에게 나는 웃으며 답했다.

네가 손을 잡아주어라. 그러면 되지 않느냐.

녀석의 어리고 큰 손을 잡으며 나는 밤을 다시 되돌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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