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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9> 서자와 서자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기사입력 2023/02/27 [09:01]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9> 서자와 서자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입력 : 2023/02/2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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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 젖가슴 1     ©장애인인식개선신문

 

<9> 서자와 서자

 

 

 

대전을 범하고 국보를 취한 뒤 대비전에 나아가 수렴청정을 청하려 하였소!

달려 곧장 궐로 들어섰으나, 이미 극은 시작된 상태였다. 추국장까지 문 두어 개를 남겨둔 걸음에서 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죄인들의 몸피가 보였다. 고형으로 인해 그들의 옷은 더 붉어져 있었다. 박응서의 입에서 대비의 이름이 나왔다. 수렴청정이 나왔다.

임금의 붉은 용포 또한 보였다. 이번에는 추국장에 임금도 자리하여 친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계속하여 걸어갔다.

이제 문 하나를 남겨두었다. 노신은 체통을 잃고 뛰다시피 걸었다.

나의 품에 박치의가 전한 살우첩(殺友帖)이 들려 있었다. 일곱이 칼을 든 이유와 용상 앞에서 누가 누구를 어느 순으로 벨지를 소상히 적은 거사의 증좌였다. 다소 늦긴 했으나 극을 뒤엎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기어코 마지막 문을 지났다. 그때, 추국장에 막 들어서려는 나를 한음이 붙들었다.

형은 일단 들으심이 마땅하다 생각됩니다.

붙들고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상황이 어느 때보다 좋지 않습니다. 형은 부디…….

문을 지난 바로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멈추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두 문 밖에서 어렴풋이 살피던 죄인들의 몸피는 산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이었다. 지금 살아 임금 앞에서 역모를 외치고 있는 죄인은 오직 박응서뿐이었다.

대비와 대군도 이를 알고 있었는가.

임금이 물었다.

두 사람은 모르오.

네 입이 역모를 담고 수렴청정을 내뱉는데 두 사람이 몰랐다 하니, 내 더 물을 자가 이제 하나밖에 없구나.

임금이 이이첨을 향해 몸을 돌렸다.

대사헌 이이첨은 지금 당장 연흥을 입궐시키도록 하라.

임금의 명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곧장 소환되었다. 그보다 전에 대비가 추국장으로 건너와 앙칼진 목소리를 내었다.

주상, 모함입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궐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네가 무엇을 얻고자 하여 거짓 고변을 부리느냐, 뜻대로 될 듯싶으냐!

우리는 임금을 폐하고, 대군을 옹립하려 하였소!

믿어볼 수밖에 없는 약조를 만들어낸 자와 그를 듣고 있는 자 사이에서 서자가 울부짖듯 말했다. 초연한 눈빛으로 박응서는 끝까지 극을 끌어갔다.

연흥은 답하라. 경이 배후인가.

소환된 김제남은 어떤 말도 소용없음을 알고 죄를 부인하지 않았다. 없는 죄 앞에서 연로한 그의 몸이 사헌부 관원들에게 붙들렸다.

― ……처분하소서, 전하.

왕의 물음에 김제남이 한 마디로 답했다. 대비의 부친은 스스로 죽을 때임을 알아, 눈을 감고 몸을 집행자들에게 맡겼다. 그는 그대로 끌려 나갔다.

당장 멈추어라, 그 손 떼지 못하겠느냐!

대비가 실성할 듯이 소리를 질렀다. 임금보다 아홉이 어린 어른의 눈에서는 흰자만 보일 듯하였다.

주상, 어찌 이러시오. 근본 없는 고변을 어찌 그대로 믿으시오!

대비가 임금에게 달려들려 하자 주변의 몸들이 그를 막았다.

아우를 봐야겠습니다. 대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금이 말하자 대비에게서 나오는 말은 이제 언어가 되지 않았다. 왕실의 언어로 쓸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대비를 다시 처소로 뫼시어라.

사직의 어른이 홀로 처연하게 악을 외치니, 도리어 나서는 신하가 더욱 없었다. 앞서 스스로 놓았던 세가 이제는 임금의 세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나를 막아서는 것은 이미 시작된 친국이 아니었다. 이이첨이 벌이고 있는 극도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쥐듯 거짓 약조를 믿기로 한 서자의 고변은 더더욱 아니었다.

임금이었다. 나를 막은 건 임금이었다. 죄를 묻는 그에게서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익의 서자 서양갑…… 김평손…… 심우영.

임금이 추국을 기록하던 서기의 글을 빼앗아 읽었다.

박치의…… 박치인…… 박응서.

일곱 서얼의 이름이 임금의 혀에서 재차 기록되었다.

대사헌은 들으라.

, 전하. 신 이이첨, 말씀을 듣기를 청합니다.

일곱의 서자가 모반을 시도하였다.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배후임을 인정하였고 모반의 계획은 대군을 옹립하여 대비의 수렴청정을 실현코자 함이었다.

임금의 목소리는 군왕답게 담대하였으나, 분명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들이 과인을 죽이고 종묘사직을 뒤엎으려 하였다. 왕실의 턱밑에서 외척이 칼을 벼리고 있었는데 사헌부는 이를 살피지 못하고 무얼 하고 있었던가.

떨림은 비단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검은 옷을 입을 때의 패기 또한 아니었다.

죄인과 함께 벌을 주어야 함이 마땅하나, 우선은 나라의 어지러움이 이토록 크니 남은 책임을 완수한 뒤에 내게 다시 고하도록 하라.

, 전하. 신과 사헌부가 명을 받들 것이옵니다!

이이첨이 큰 소리로 답하였다.

너희는 듣거라.

임금이 추국장의 모든 신들에게 말했다. 임금이 노함을 감추지 않고 말을 낮추니, 자리한 이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너희가 왕실과 사대부의 예를 같은 것으로 보고 적서를 논하며 과인을 업신여겼음을 모를 줄 아는가.

나는 저 임금의 목소리를 안다. 애써 힘주어 말하는 저 소리를 나는 익히 안다.

하여 저 서출이, 같은 서출인 과인을 죽이고 적자를 옹립하려 하였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모순인가.

선왕에게서 서자로 미움받아, 분조라는 허울로 버려진 세자의 목소리를 나는 안다.

너희가 사사로운 내력 하나를 논하는 동안 유가의 가르침인 삼강이 무너질 뻔하였다. 모르는가? 배는 달리 하나, 어미인 자가 아들을 폐하려 하였다. 그리고 죽은 지아비의 선위를 뒤집어 옥좌를 강탈하려 하였다. 그리 되었다면 나는 폐해진 아들로 선왕을 봬야 했을 테니 그보다 더한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너희는 답해보라. 너희의 신하됨이 청명하지 못하여 군왕이 오늘과 같은 치욕을 겪었으니 내 너희에게 무슨 벌을 내려야 하겠는가, 무슨 벌을 주어야 마땅하겠는가.

노신에게 이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과인은 오늘을 잊지 않을 테니 너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서라는 너희 그 가난한 논리를 앞으로 과인에게 내세우지 말라. 그것이 곧…… 역모이고 모반이다.

분조의 연로한 신하들이 다그칠 때 지지 않으려, 두려운 내색을 하지 않으려 내었던 그 서출의 첫 목소리를 나는 알고 있었다. 서자를 친국하던 서자에게서, 오늘 나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한음도 나와 같은 것을 들었음이라. 나와 생각이 같았음이라. 하여 나를 막았음이라. 나는 이제 이 일이 이이첨과 대북의 공작이라고만 여길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무력감을 느꼈다.

이미 임금이 뜻을 품어 극에 동참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효해졌다. 박치의가 전한 진실도, 내 품에 들린 일곱 서자의 살우첩도 임금의 작심 앞에선 무효한 것이었다.

소리를 내고자 주변을 살폈으나, 이내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누구도 힘을 보태지 않았을 것이다. 한음과 나는 속하였으나 속하지 못한 자였다. 당이 있으나 당이 없는 자였다. 스스로 초월코자한 자가 수를 써 현세의 일을 애써 고치려 드는 것은, 혼불의 소리를 내어 다른 육신의 귀를 열고자 함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간 지녀온 나의 익살이 자충수 같았다. 편전에서 곧잘 던지곤 하던 나의 농에 내 스스로가 희롱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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