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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5> 대립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기사입력 2023/02/25 [08:01]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5> 대립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입력 : 2023/02/2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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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 젖가슴 1     ©장애인인식개선신문

 

<5> 대립

 

 

 

이윽고 명의 원병도, 더 이상의 조선의 죽음도 필요치 않은 순간이 찾아왔다.

바다에서 크게 적의 전세가 꺾이고 그들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사하자 왜는 타오르던 몸을 스스로 사위어 반도에서 발을 빼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이 났다.

임금은 종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바다에 싸우다 절명한 장수가 있었고 산과 고개에 무수한 의병장들이 있었고 또한 백성들의 입 위에 바로 세자가 있었다. 임금이 또 다시 명에 청원하여 그들의 힘을 얻어오기 전에 난의 전세가 꺾이고 싸움이 끝나버렸다.

임금은 임진년에 끌었던 수레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왔다. 그는 북으로 가 명군을 얻어온 일을 신들 앞에 더욱 강조하였다. 하여 그는 전란의 경과를 두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어가의 수레를 끌었던 마부조차 호성공신으로 봉하였다. 임금은 앞날의 제 도망에 끝까지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임금은 청원을 성사시켰던 한음 또한 공신으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스스로 극구 사양하니 끝내 봉해지지 않았다. 임금은 이 일로 한음에게 크게 마음이 상하여 한동안 그를 찾지 않았다.

왕후가 병으로 죽자 임금은 다시 간택 이야기를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인 김제남의 딸을 비로 받아들이니, 새 왕후가 된 그녀는 세자보다도 아홉 살이 어렸다. 병오년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산실에서 이윽고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임금이 그토록 바란 정궁의 대군이었다. 잔병을 앓아 줄곧 안색이 좋지 못했던 그가 그날만은 대군을 안고 아이처럼 크게 기뻐하였다.

 

 

임금이 다시 제 언어와 제 일로 바쁠 때 세자도 이제는 스스로 가지게 된 언어로 일을 꾸려나갔다.

그의 곁에 나와 한음이 있었고 또한 병조좌랑 이이첨이 있었다. 임진년 병조 아래 설치된 화기도감(火器都監)은 이제는 유명무실한 임시관청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세자의 발길이 자주 닿곤 하였다.

임금이 보지 못한 것을 세자가 전장에서 보았다. 그는 왜의 조총을 보았고 명의 불랑기포를 보았다. 또한 이이첨이 적에게 보낸 수레에 심었던 비격진천뢰를 보았다. 하여 세자는 기술의 힘을 스스로 갖기를 절실히 원했다. 전에 없는 힘을 가진 포의 제작과 약의 개발을 그가 추진해나갔다.

화포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자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마련이다. 하여 명은 조선이 화포와 화약을 스스로 제조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일은 조용히 치러져야 했다. 그 이유였는지, 세자는 나와 한음에게조차 꾸리고 있는 일의 흐름을 소상히 밝히지는 않았다. 나 또한 멀찍이서 살피며 간신히 짐작만 하는 정도였다.

세자는 심히 몰두하였고 그 정도가 심하여 제 후각이 약의 냄새에 아주 무뎌지게 된 것을 모르는 듯했다. 세자를 만날 때 그의 옷에서는 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숨기지 못한 냄새가 자주 났다. 유황 냄새였다.

 

 

너를 세자로 책봉한 것은 전란 때 국본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늙은 임금이 제 정치로 바빴다고 하나 젊은 세자의 옷에서 냄새를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군이 태어났음에도 과인은 너를 폐세자하지 않았다. 한 번 세운 뿌리를 애써 꺾으려 하지 않았다. 기회가 올 때면 선위를 입 밖에 꺼내는 것 또한 망설이지 않았다. 너는 아느냐.

임금이 늦은 밤 세자를 찾아 말했다. 꾸짖는 자리엔 항상 스승이 함께하는 법이다. 임금이 친히 세자사인 나를 불러 따라 앉게 하였으니 편전에는 임금과 세자와 나, 세 사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란이 끝났음에도 너는 병정놀이를 하며 나라 땅을 제 놀음터로 알아 경망하게 떠돌고 있으니 사직의 국본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편전을 울리는 것은 오직 선병질적인 눈을 뜨고 있는 임금의 목소리뿐이었다.

왕위가 탐나더냐.

임금이 물음을 건네었다. 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과인이 늘 꺼내던 선위 이야기가 네게는 농 같더냐.

전하께서는 소자에게…… 한 번도 농을 주신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반문하는 세자의 목소리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말에 각을 세우는구나.

임금은 그리 말하면서도 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세자에게는 제가 가진 언어가 있음을 일찍이 알게 된 임금이었다.

머지않아…… 선위하겠다.

임금이 또 선위를 입 밖에 내었다.

그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그것을 자주 수로 사용하였다. 스스로 세자에게 옥좌를 내어주겠다는 그 의미는 과거 세자를 오히려 압박하는 수였고 정치였다.

원한다면 왕위에 올라라.

그러나 이번에 꺼낸 말은 정치가 아닌 듯했다. 이야기를 잇는 임금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다.

말씀을 거두어 주소서.

마땅한 시기를 찾아 곧 대리청정을 시작하겠다. 과인이 뒤로 물러나 상왕으로서 내치를 돌보겠다. 허니 너는 왕위에 오른 뒤 대군을 세제로 책봉하라. 그리고 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오직 너는 국방과 군무에 힘쓰라.

― …….

그리고 훗날…… 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라.

그날 나는 두 아들을 두고 저울질하는 아비의 모습을 보았다. 그 꼴이 사람 하나가 제 오른손을 두고 왼손과 거래를 하려는 모양새 같아, 나는 사람과 그 손 모두가 애처롭고 가여웠다.

 

 

오성은 들으라.

자리를 파하고 세자와 나를 물렸던 임금은 같은 날 밤 다시 나를 찾았다.

경을 세자사로 봉한 것은 편당하지 않고 강직하게 정무를 행하는 경의 성정을 세자가 닮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임금은 앞의 자리에서 나를 배석시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경과 함께한 자리에서 선위와 대리청정 이야기를 꺼낸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허니 필히…… 잘 살피도록 하라.

신 이항복, 명을 받들겠나이다.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임금이 내게 살피기를 명하는 자가 세자인지 대군인지 스스로 분간할 수 없었다.

유황 냄새가 명으로까지 퍼지지 않게 하라.

임금은 세자가 화기도감에서 벌이는 일을 막으라고도 하였다.

조선이 천자의 마음을 잃게 된다면, 나라꼴이 꼭 나를 잃은 세자와 같은 모양새가 될 것이다. 경은 뜻을 알겠는가. 시간이…… 많지 않다.

, 전하…….

임금의 마지막 말을 받들고 나온 나는 곧장 퇴궐하였다.

늦은 밤이었고 날이 조금 추워 옷깃을 여며야 했다. 매무시를 하고 길을 다시 나서려 하는데, 사람 하나가 내 앞에 섰다. 표정 없는 자가 말을 건네어 들으니 병조의 사람이라 하였다. 현기증이 일었다. 이번에는 세자가 다시 나를 찾은 것이다.

나는 못나고 가련한 임금을 대신해 세자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아비와 대립하여 지금 나를 찾고 있는 아들에게, 임금이 선위하여 옥좌에 대립(代立)하려는 세자에게 또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 걸으며 고민해야 했다.

왕가의 지붕 위로 뜬 달의 시간은 그 밤사이로 정치가 흐르기에 충분히 길었고, 나는 신하된 자로 그 시간과 밤 위를 아스라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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