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4> 베어진 머리
<4> 베어진 머리
― 이 자가 제 죽음은 두렵지 않으니, 저하를 자기들 본대로 데려가라 하고 있습니다! 적장이 반대쪽의 제 부하들이 듣도록 무어라고 크게 떠들자, 역관 김경제는 곧장 그 말을 옮겼다. 적들은 제 수장의 말을 듣고 잠깐 몸을 움찔하긴 했으나 상황의 판단이 어려운 듯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때 이이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적장에게 재갈을 물려라! 옆에 있던 나도 말을 거들었다. 그를 붙잡고 있던 병졸들이 나의 명에 급한 대로 단도의 칼집으로 재갈을 물렸다. 혀를 깨물어 자결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 김 역관은 계속하여 내 말을 옮겨라. 이이첨은 적의 진영에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 죽지 않을 만큼만 고통을 주었다가 다시 살려 또 죽을 듯한 고통을 줄 것이다. 그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두렵지 않은가. 한 나라의 세자를 해하려 한 중죄인에게 벌이 그리 쉽고 빠를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역관이 말을 옮겼다. 적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양쪽 진영 모두 긴장을 풀지 않는 대치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일의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모두의 시선이 극히 어지러울 때, 계속하여 적을 살피는 이이첨의 눈빛만이 선명하였다. 대치는 계속 이어졌다. ― ……교환할 요량인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내가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 그러합니다. 그 대답을 한 후 이이첨은 제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들었다. 그리고 베었다. 머리 하나가 아래로 뒹굴었다. 그 한 칼에 모두가 넋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또 베었다. 머리가 또 뒹굴었다. 우리 병졸의 머리였다. 조선 육군의 머리였다. 이이첨은 또 베었다. 하나, 둘…… 계속 칼을 휘두르니 베어진 머리의 수가 열이 되었다. 나와 적장 그리고 세자…… 그 누구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몸이 오롯이 굳어 있었다. 경악을 넘어선 무지로 인해 어느 누구도 그 칼의 휘두름을 막지 못했다. ― 너희에게 수급 열을 주겠다. 살피건대 너희의 본대 사령관은 분명 가토놈이겠구나. 이이첨이 적의 진영에 소리쳤다. 역관은 잠시 넋이 나간 듯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을 옮겼다. ― 놈은 포상이 후한 것으로 안다. 가토에게 가 이 수급을 바치고 포상을 받아라. 너희의 수장과 함께 수급을 넘길 터이니 세자 저하를 동시에 보내도록 하라. 이이첨이 계획을 적에게 알렸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는 산 자들을 시켜 수레 하나의 짐을 아주 비우고, 죽은 자들의 머리를 싣게 하였다. ― 너희의 수장과 세자 저하의 교환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곧장 자리를 뜰 것이다. 그때 이미 죽어 있는 우리 병졸들의 머리 또한 베어 수레에 함께 실어 가라. 수지가 맞는 일이 아닌가. 이이첨의 말에 적들이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 부관급으로 보이는 자가 세자를 붙들고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또한 움직였다. 이이첨은 적장에게 수급이 든 수레를 직접 뒤로 끌게 하였다. 또한 병졸로 하여금 그의 목에 칼을 대어 앞만 보고 걷도록 하였다. 양쪽 모두가 원하는 결과로 모자란 상황이 아니었기에 교환은 일사불란하게 치러졌다. 세자가 우리 쪽 진영에 가까워지자 그를 따르던 적도 경계를 풀며 뒷걸음을 하였고, 적장을 살피던 우리 쪽 병졸도 다시 진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교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이이첨이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고성을 질렀다. ― 모두 엎드려라! 이이첨이 진영으로 넘어온 세자를 넘어뜨리며 저의 등으로 그를 감쌌다. 순간 적장이 끌고 간 수레에서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수많은 쇳조각이 파편이 되어 적의 진영을 덮쳤다. 적장의 등 뒤에 붙들려 넘어간 수레엔 열이 아닌 열하나의 무게가 들려 있었다. 이이첨이 수급들 사이에 은밀히 비격진천뢰를 넣어 보낸 것이다. 비격진천뢰는 심지에 불을 붙이면 시차를 두고 터지는 조선의 신무기였다. 그가 수레를 화포처럼 이용하여 적에게 포탄을 보낸 것이다. 거리와 시차가 다행히 맞아 떨어져 우리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이이첨이 몸을 던져 방어한 세자 또한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 쫓아라! 적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살아 도망가는 이가 있었다. 이이첨은 추격을 명했다. ― 자네, 다행히 수가 맞아 떨어져 이리 된 것이지. 아주 위험천만한 짓을 하였네! 병조참판이 흥분한 목소리로 이이첨을 닦달하였다. ― 그리고 교환하는 데 굳이 열이나 베어 줄 필요가……. ― 저하의 무게가 감히 저 적장 놈의 것과 등가한 것입니까. 이이첨이 품계의 차이를 잊고 참판에게 곧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이첨의 말이 옳았다. 그 옳음이 하나와 열하나의 차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장만 교환한 채 그대로 적들을 살려 보낸다면, 그들이 본대에서 다시 큰 무리를 끌고 와 아직 멀리 피하지 못한 우리를 궤멸시키고 세자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 어떻게든 그들을 일격에 모두 없애야 했다. 그의 계산이 옳았다. 열을 먼저 베어 내어주고, 하여 적들을 믿게 하고 우리의 추가적인 피해는 없게 하였으니 그의 결단이 퍽 이해되었다. 다만 급박한 상황에 이 젊은 사서가 이리도 냉철한 과단을 보일 수 있다는 것만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었다. ―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또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추격하는 병졸들에게 잡혀온 적들 중에 조선말을 쓰는 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 저희는 왜에게 잡힌 포로일 뿐입니다! 잡은 적들의 무릎을 꿇리고 살피니, 조선인의 수가 열댓 정도 되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는 계속 살려달라고 빌었다. 머리가 세어 이미 연로한 자였다. ― 사실대로 고하라. 포로의 허리에 칼을 허락하는 것이 어느 나라의 군율인가. 잡힌 조선인 일부가 무장한 상태였음을 나 또한 이이첨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 그것이…… 살려만 주십시오. 단지 저희는……. 그 자가 고하니, 그들은 돈 있는 양인의 군역을 대신 지는 대립군(代立軍)이었다. ― 저희가 대립군인 것을 알고 무언가를 주면 자기네들을 쉬이 따르리라 판단하여 놈들이 저희를 살려주었습니다. 이들은 그래도 저희에게 주리지 않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목숨 걸어 대립을 해도…… 방납(防納)으로 다 빼앗겨 항시 주리는 저희들이니…… 살려도 주고 먹을 것도 준다는데 마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로한 이가 상황을 설명하였다. ― 저희는 그들의 짐만 끌었을 뿐입니다. 교전하게 되면 짐을 지키라고 몇몇 것들에게 칼을 내어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까 일찍이 빠져 싸우지 않았습니다. 허니 뒤에 있던 저희가 포탄을 맞지 않고 살아 도망갔던 것이지요. ― 저하, 군역을 대신 진 이들이 바라는 것이 넘쳐 왜와 내통까지 하였으니 저하께서는 즉시 처분하심이 마땅하옵니다. 이이첨이 제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세자에게 말했다. ― 사야가 김충선과 같은 항왜의 존재들로 인해 적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지고 또 그들이 치욕을 느꼈습니까. 대립군이 적을 도왔다는 사실이 퍼져선 안 됩니다. ― 짐만 들었습니다. 저희는 같은 조선인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두 사람이 세자를 보며 목을 높이니, 당황한 세자는 뜻을 묻고자 내게 눈을 돌렸다. ― 굳이 행형을 급히 처리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리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무리가 우리에게 닿을 수 있으니 우선은 저들과 함께 열을 옮기소서, 저하. 피하는 일이 급했다. 또한 그들이 베어진 머리들처럼 유효하게 죽을 일도 없었다. ― 안 됩니다, 저하. 전란에는 행형의 자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 즉시 처분하십시오. 먼저 처분한 뒤 열을 옮기십시오. 군율의 지엄함을 보이소서! 이이첨이 곧바로 맞받아쳤다. 그는 세자에게 벌과 모짊을 행할 것을 강요하였다. ― 저하! 다그치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세자는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 저하, 실현하소서! 끝까지 소리친 이는 이이첨이었다. 나는 처분이 아닌 실현이라는 그의 말이 걸렸다. 그러다 상황을 마무르고 다시 길을 옮기니, 그날 이이첨의 손에 베어진 머리의 수는 기어코 열을 넘고 말았다. 세자가 제 결정으로 빚어낸 첫 죽음이었다.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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