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문화예술의 원년으로 보는 40여년을 문화예술단체를 이끌어온 그의 인생 여정이 우리나라의 장애인문화예술에 전반적인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애문화예술의 관련법이 전무하던 때, 문화예술진흥법을 개정하여 42조에 관련조항을 개정하여 지원 근거를 마련하고, 장애예술인지원법을 새로 제정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맞아 앞장서 왔으며,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식(대상: 대통령상 상금천2백만 원), 나눔 연극제, 전국장애청소년예술제, 장애인문화예술지원센터 등 한국장애문화예술의 대표적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실행해 왔다.
우리나라 장애문화예술의 수장이라 할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이사장을 역임한 장본인이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Q-앞에 두개의 장애문화예술 관련법 개정과 제정에 대해 자세한 말씀을
A-제가 설립한 한국장애인문화협회가 82년도에 설립해 21년 후 2003년에 문화체육관광부로 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았는데, 문체부의 장애인관련으로는 네 번째 단체였다.
그 전까지는 장애인문화예술에 관한 관심도, 활동도 거의 유명무실한 상황 이였는데, 우리 단체가 열심히 사업을 펼치는 사이에 문화예술의 필요성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단체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고, 지금은 문체부에 등록된 문화예술 관련 장애인 단체가 약 25~30개 단체가 등록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그 외 시 도 법인과 전문단체 등을 포함한다. 면수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와 같은 이유로 2007년에 같이 활동하던 장애문화예술단체들에게 연대할 것을 제안해 비장애인 예술인들의 한국예총과 같은 기능을 갖춘 장예총(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을 설립하고 제가 상임대표를 맞아 시작한 첫 사업이 장애문화예술관련법의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당시 손봉숙(민주당)의원이 추진하던 '장애인문화예술진흥법'의 개정 이였다.
동법 42조에 장애문화예술인이나 단체를 지원할 수 있다.라는 최초의 조항 이였다. 이것마저도 여야 당쟁에 묻혀 마지막 회기에서 폐기될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에 우리 단체장들은 여 야 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결과 회기 마지막 날에 국회를 통과해 장애문화예술의 마중물로서의 귀한 역할을 해왔다.
그 이후 두 번째 기회는 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 재직중이였던 2020년 마지막 회기에 이었는데, 당시 나경은(현,국민의 힘)의원이 추진해온 장애예술인지원법이 여당의 동의와 일부 장애예술인단체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역시 폐기될 처지였다.
다음 국회때 다시 추진하자는 분위기 였으나, 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의 기능 개편의 필요성이 나타나 제 판단에 여야의 입장과 장애인단체들의 의견만 조정되면 이번 회기에서 처리가 기회라는 판단을 했다.
문체부의 입장과 여야, 그리고 장예총 단체들을 설득한 후 함께 국회의원들을 설득한 결과 최초의 장애예술 독자 법안인 '장애예술인지원법'은 마지막 회기에서 극적으로 탄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치만 '장애예술인지원법'은 여야와 정부, 그리고 장예문화예술단체들과 장애예술인들의 요구를 완벽하게 담아내지는 못하였고 기초만 만들어 세워진 건물과 같기에 앞으로도 집에 필요한 인테리어들을 체워넣듯이 법을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Q-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을 국내최초로 만든 이야기
A-18년 전에 제가 처음 기획하고 시작한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은 우연히 초청받아 참석했던 '백상예술대상'을 보고, 우리 장애인계에도 저런 시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날이후 현장에서 받아온 팜플렛 한권을 간직하면서 큰 꿈을 실현하고 싶은 열망이 샘솟았다. 3년만에 행사 개최 준비에 들어 갈때, 대한민국예술대상식조직위원회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 3가지의 원칙을 세워 추진했다.
△첫쩨 상은 가장 권위가 있을것 △둘째, 수상자는 가장 공정하게 선정 할 것 △세제, 수상자에게는 최대한의 예우로, 시상식은 가장 화려하게 거행한다는 원칙아래 시상 명을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이라 정하고 제 1회 대회의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첫 번째 조건인 상의 권위는 1, 상의 운격. 2. 역사, 그리고 마지막 조건이 3. 상금이다.
권위의 3대 요소인 역사는 첫대 회를 준비하는 우리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문제였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행사명에 ''대한민국" 이 넉자를 앞에 당당히 내세웠는데 이 전까지 장애관련 행사명에 대한민국을 넣은 행사는 우리 예술대상이 처음이다.
운격문제는 세 번 정도 행사를 치러야 장관상이 주어지는 것이 통례라 하는데, 문체부를 설득하고 사정한 결과 장관상 하나를 받아내었고, 상금은 곡간을 탁탁 털어 6개 부문에 총 1천8백만 원을 마련해 시상하였다.
수상자의 선정은 문화부를 통해 지방 자치단체별로, 그리고 관련단체로 부터 추천을 받은 후 1차 서류 심사를 걸쳐, 예총, 관련기관, 언론기관에 요청해 추천받은 심사위원 13인으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수상 후보자를 각 부문별로 3배수를 확정하여 문화부에 올렸다,
문화부에서 최종 심의와 신원조회를 거쳐 최종 수상자가 결정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1회째부터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시상 장소로는 서울의 좋은 장소로 이름이 알려진 곳을 다 확인하였지만 편의시설, 동선 등이 불편해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과 "전국장애청소년예술제"를 동시에 진행할 때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 일산 킨 텍스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준비기일까지 3일간 대관하여 제1회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시상식과 제1회 전국장애청소년예술제(당시 전국장애인문화혁신대회)를 일산 킨 텍스에서 3층이 만찬을 할 수 있는 홀인데 사흘 동안 대관하여 행사를 마무리 했는데 결과로 예술대상은 대상 1명 △문체부장관표창, 상금 5백만 원 △ 공로상(문화협회장 표창, 상금 3백만 원 1명) △ 본상(문학, 미술, 음악, 대중예술, 상금 각 2백만 원) 본 행사 하나로 2억(상금 포함 정부지 원 없음) 여원의 적자가 발생해 엄청난 경제적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매년 적자를 감수하면서 3년을 버틴 끝에 4회째부터 영예의 대통령상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표창과 장관표창 4개 등 전 부문 국가의 표창이 수여되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시상식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국회의장 표창과 헌법재판소장 표창까지 더해지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전국장애청소년예술제 역시 유망 장애예술인들의 등용문으로서 이어져 오고 있다,
Q-한때는 장애인들의 중매쟁이로 유명하셨다 던데 …….
A-제가 일을 처음 시작한 80년대 초 장애인의 3대문제가 △첫번쩨교육 △ 두번쩨 문제가 자립, △세번쩨가 결혼 문제였는데, 교육과 자립문제는 제도를 보완하거나 부모들이 도와주면 해결을 할 여지가 있지만 결혼문제는 나랏님도 부모도 대신하거나 도울수 없는 문제였기에 이를 해결할 방안이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당시 화제가 되였던 "농촌 총각과 도시 처녀의 합동맞선"을 벤치마킹하여 협회의 첫 기획사업으로,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간의 결혼을 위한 중매프로그램인 "푸른하늘합동맞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엄청난 화제를 일으켜 이후 협회안에 무료 상담소를 개설하여 1985년부터 2004년까지 약 20여년을 이어왔고, 더우기 전국의 복지관들과 여러 단체들이 우리의 맞선대회를 역으로 벤치마킹하여 전국적으로 유사한 행사들이 계속 이어져서 이제는 장애인들의 결혼 문제는 극복이 되였다고,생각한다.
어쩔수 없어 중매방식으로 결혼 프로그램을 기획했지만 몸에 장애가 있는 장애인들은 중매보다는 연예가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협회도 한동안 맞선대회와 함께 부대 프로그램으로 "푸른하늘합동결혼식"과 미팅형식의 "사랑의 짝꿍대회"들을 개최해 왔으나, 지금은 모두 접고,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추억으로 간직한 체 내가 했던 일 중 가장 뜻있는 일이였다고 생각이 된다.
Q-그동안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인식개선, 편의시설, 국제장애인 인권문제 등 장애인관련 여러 부문에 일을 해 오셨는데, 앞으로의 계획과 또 어떤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신지
A-문화창조기지는 장애인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으로서 그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협동조합입니다.
추후 메타버스 가상공간에 공연장.전시관,등을 구촉해 확장성을 높이고, 시대의 발전에 대비하지 못하면 더욱 뒤쳐지니까 4차 산업의 대비하여 장애예술인들도 메타버스와 NFT ART 등 새로운 움직임에 대비하고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지나온 시대에는 여러 장애요인과 환경적 여건으로 인해 우리 장애예술인들이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그런 환경적 어려움은 없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대비에 소흘하면 그만큼 기회는 오지 않을것으로 생각이 되어 미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부문에서 새로운 문화들을 받아들일수 있는 문화예술 복합공간의 조성을 최종 목적으로 두고 있구요,
그 외에도 우리 장애문화예술인들이 활동을 하면서 회계문제, 각종 법률적 문제에 부딪혀서 여러가지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호소하는분들을 위해 상담소를 설치하여 법적, 행정적 지원을 전문적인 자원을 활용해 지원예정이다.
연예,이벤트, 모델, 등 연예기획사가 진행하는 모든분야의 장애예술인이 활동을 잘~할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더 할생각이고, 문화창조기지는 위에 목적들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지원의 역할을 다 해 나갈것 입니다.
하지만 문화창조기지가 비영리 사회적조합이다보니 투자자가 별로 많지 않은데 아름다운 동행으로 함께 해줄분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관심 부분은 우리 발달장애인들과 부모님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이유로 발달장애인들과 그 부모님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있어 그 준비의 일환으로 “한국장애인입업협회”를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준비하고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설명 드리고, 그밖에 장애인들의 또 하나의 직업군의 개발을 위해 뜻있는 분들과 장애인모델협회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Q-끝으로 가족관계는
A- 부모님이 8남매을 낳으셨는데 그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셨고, 누님, 한분과 형님 두분도 돌아가셨습니다.
내 바로위의 형님이 계셨는데 아들과딸 남매를 두셨고, 그조카들과 내가 한집에 살다보니 공부와 그림도 가르치고 하면서 살뜰하게 지냈습니다.
그 이후 형님이 일직 돌아가시면서 자연스럽게 조카들을 아들 딸 처럼 서로 부등켜안고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나에게는 형님이 남겨주신 아들과 딸, 사위와 며느리를 선물로 받아 외롭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홀로 살면서 욕심없이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을 내 인생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 왔는데, 그런중에도 항상 힘들때, 우리 가족들로 부터 위로를 받았고 손주, 손녀들의 재롱과 응원이 나에게는 늘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장애예술인의 지원 활동을 해온 저의 모든 역량과 정신을 바쳐2023년을 열심히 달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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