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
김철우
상도동의 그 골목길 끝에는 아직도 가로등이 서 있다. 골목 입구의 구멍가게는 이제 ‘나들가게’라는 그럴듯한 간판으로 단장했고, 맞은편에 있던 대림탕은 역시 채산성을 고려한 건축업자에 의해 꼬마 빌딩에게 자리를 내줬다. 어린 시절, 두려움 속에 달렸던 골목 양쪽의 키 낮은 기와집들은 이미 공동주택들이 들어서며 훌쩍 키가 자랐다. 속절없이 세월만 흘려보내고 입구의 나들가게와 함께 바로 그 골목임을 확신할 수 있던 것은 골목길 끝에 서 있는 가로등이다. 내게는 ‘아버지의 가로등’으로 기억되는 그것은 이제 가로등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로지 전선이나 통신선을 붙잡고 있는 전봇대의 역할만 남겨졌다. 기능 상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세월의 파도에 상처 입은 존재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이다. 더구나 중력을 고스란히 수용하여 아래 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는 느슨한 전선들과 더 사용되지 못하고 잘린 전선들이 인연을 끊어내고도 깔끔히 정리되지 못한 인간들처럼 지상을 향해 늘어져 있다. 가로등 아니 전봇대에서 그나마 기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허리춤에 박힌, 쇠로 된 발 받침 봉이다. 아버지의 노제(路祭) 때 설치했던 대형 천막의 한쪽 귀퉁이를 받침 봉 하나에 의지했던 기억 때문인지 자꾸 눈길이 간다.
그러나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가로등 뒤 담장 너머 오래된 집이 아직도 있다는 것. 당시 우리 집은 오래된 집과 맞은편 담장을 공유하고 있던 터라 늘 마주하던 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네에서 가장 오래되고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골목길 끝에는 오래된 집을 끼고 위쪽으로 막다른 골목길이 있었는데 네 집의 문이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가장 오른쪽 집에는 나보다 서너 살 나이 어린 여자아이가 살았고, 구조적으로 우리 집과 비슷하여 한 업자가 동시에 지은 집이 아닌가 생각했었던 그 옆집은 S 대를 다니는 형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고 이듬해 다시 시험을 봐서 입학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늘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다음 집이 두 번째 집과 대문이 붙어 있었던 우리 집.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와 나머지 학창 시절의 추억을 모조리 쏟아부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집이 앉았던 터는 그리 좋지 않았다. 대문에 들어서서 마당이 나오기까지 길고 좁은 길을 지나야 했다. 더구나 양쪽으로 회양목을 심어 한 사람만 간신히 걸을 정도로 폭도 좁았다. 그리고 집터의 세 면은 모두 다른 집과 담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유하지 않은 나머지 한 면이 바로 길고 좁은 입구 길이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한 집터였다. 마치 속이 빈 대나무를 입에 물고 물속에 누워있는 듯한. 그리고 마지막 집이 바로 오래된 집으로, 두 개의 길을 접한 그 집은 누가 봐도 좋은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예의 그 골목길에서 올라오며 보이는 붉은 벽돌 담장과 담장을 덮은 넝쿨은 꽤 근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 집을 오가며 오래된 집의 문 앞을 지나야만 했던 나는 단 한 번도 이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또래의 남자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세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학생들과의 생활 패턴이 달라서일까. 그 집에는 들고 나는 사람을 본 일도 별로 없었다. 그 집에 누가 사는지 몰랐던 그때 내가 했던 가장 호기심이 어린 행동은 테니스공으로 오래된 집의 벽을 몇 차례 두드리는 것이었다. 사실은 우리 집 벽을 몇 차례 두드리다가 실수라도 한 듯 오래된 집의 벽을 두세 차례 두드린 것이다. 또래의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신호였던 셈이다. 물론 나의 신호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집에는 노부부와 이미 성인이 된 장성한 자녀들이 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는 사람들을 초등학생이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오래된 집이 아직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하다. 내 어린 날의 추억 한 모서리를 이 집으로 인해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오래된 집은 다가구인지 다세대인지 아파트가 되지 못한 공동주택들이 즐비한 이 일대에서 가장 키 작은 집이 되어 버렸다. 골목길 주변뿐만 아니라 주소의 번지수 앞에 ‘산’을 붙여 굳이 산동네임을 인증했던, 우리 집 뒤편 ‘산47번지’ 일대는 이미 대기업 브랜드를 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분양가와 주변 시세, 프리미엄, 예상 수익 금액 등의 단어 등을 각종 매스컴에서 떠들어 대는데 어찌 유혹이 없었을까.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오래된 집은 마치 곁눈질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헌신한 우리 부모님을 생각나게 한다. 돈을 좇아 달려가지 않은 삶을 그대로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손때 묻은 추억을 고스란히 남겨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귀한 유산(遺産)이다
오래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사람도 사업도 하물며 사물도 그렇다. 이익을 향한 눈치 빠름이 환영받는 세태 속에서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는지, 세상사의 생각지도 못한 간사한 계략도 피해 갔을 터다. 주변은 모두 ‘빌’이나 ‘팰리스’ 같은 건물 이름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혼자 남겨지는 고뇌와 외로움은 또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 변화하지 않고 시간의 속박을 견뎌낸 끈기가 고맙다.
고귀함은 시간의 태엽 속에서 나온다. 촘촘한 와선 사이 어디쯤 숨겨진 에너지가 저절로 흘러넘치는 것이 바로 고귀함이다. 그래서 오래된 것은 천박하지 않다. 인간만이 오래 살며 간혹 천박해지는 것이 문제지만. 이제 시간의 등에 올라타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오래된 집을 떠올릴 것이다. 돌아서려는 순간 어느 집 대문 열리는 소리가 귓등을 친다. 혹시 ‘그 옆집 살던 꼬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골목길을 걸으며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골목길, 가로등, 붉은 벽돌 담장 그리고 오래된 집. 다시 눈 내리고 골목길을 뛰어가던 아이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아버지의 환영(幻影)을 본 듯하다.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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