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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건복지부 사회국 근무(중앙구호위원회 간사)'88 서울패럴림픽대회 개·폐회식 총괄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 설립(실무)→한국장애인개발원 기획·홍보팀장 (1급)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축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전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현 빛된소리글로벌예술협회 사무총장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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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들의 첫 상담역
나에겐 아들 둘이 있다. 두 아들 중 큰아이는 이미 결혼을 해서 가장(家長)이 되어
예쁜 손녀를 안겨주었고, 작은 아들은 아직 미혼으로 군 전역 후 전공에 따라 지방의 호텔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만들고 다듬어 가고 있는 두 아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성장했나 싶을 정도로 제 할 일 알아서 하는 동안 아이들과 얼굴 맞대고 고민을 들어 주거나 해결해 준 기억이 별로 없는 데다, 주말이면 남들 하는 것처럼 식구들과 함께 외식 한번 제대로 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물론 애들 엄마가 학교 일에 참견하거나 두 아이의 진로에 대해 질문하고 상담하고 넌지시 자신의 의견도 권하는 모습을 가끔은 보곤 하지만, 아내역시 크게 간섭하지 않은데다, 나로선 거의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자식들 일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다. 언젠가 나는 두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너희의 장래 선택은 너희가 꼭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하도록 하라”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맡겨 두었고, 평소 자식들의 장래 문제는 그 방법이 옳다고 여겨왔다.
그런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방에서 근무하는 막내아들이 집에 올라와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한다. 아들이 상담을 요청해 온 사실이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하고,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묘한 기분이 교차했다.
상담을 하려면 분위기에 따라 장소가 중요하기도 할 것 같아 밖으로 나갈까 했더니 그냥 자기 방에 들어가 말하겠단다.
방에 들어가니 나를 책상 의자에 앉으라 하고, 자신은 조그만 의자를 끌어 당겨 마주 앉는다.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윽고 입을 뗀다. “아빠, 저 직장 그만둘까
생각 중입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인지 다그쳐 묻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다니고 있는 호텔이 새로 개관 한지 이제 3개월이라서 일은 엄청 많은데, 아직 월급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단다. 그리고 경영진의 생각 자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도 않으면서 월급까지 받지 못하고 있어 직장을 다니고 싶은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아들의 말 한마디에 어떤 심정인지이해하고 동감하면서, 잠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결정에 도움이 되도록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사표 내고 나오너라. 다만, 출근하는 대로 너의 직속 상사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당장 그만둬도 회사업무에 지장이 없는지, 아니면 후임자가 올 때까지 일을 계속할 것인지 물어보고, 너의 확고한 결심을 전하도록 하여라.
3개월 치 체불임금의 지급요청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 동료들과 함께 공동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무튼 마음의 결정을 진행하기 바란다."
나는 아들의 첫 직장을 이런 식으로 그만 둔다고 해서 실패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 둔다고 결정하면 더 넓은 생각과 경험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직장을 그만 두고 나오면, 나하고 함께 유럽 여행이나 다녀오자”
이참에 관광 경영을 전공한 아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게 하려면 그 방면으로 경험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부자지간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생각한 것이다.
2. 아들과의 첫 여행
그런 일이 있고나서 약 1개월 후 아들과 나는 지도를 펼쳐 놓고 여행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먼저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를 지도에 표시하고, 각 나라별로 꼭 둘러보고
싶은 관광지를 리스트로 만들었다. 이런 과정이 이미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우리는 의기투합한 사나이들처럼 여행 가방을 펼쳐 놓고 준비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챙겨서 가방에 집어넣는다. 나도 회사에 16일간의 일정으로 휴가를 내고 아들과 함께 여행준비를 하면서 생각해 보니, 이때 아들과의 대화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이미 여행길에 들떠있는 아들을 위해 가방 챙기는 것을 일러 준다. 16일 일정에 알맞게 옷가지 등을 준비하고, 여행용 가방에 옷을 넣을 때는 가급적 구겨지지 않도록 박스나 대롱을 이용해서 둘둘 말아 넣으면 좋다는 것, 수하물로 부칠 것과 조그만 가방에 별도로 준비해서 기내에 반입할 수 있는 품목을 확인하고, 세면도구, 필기구, 핸드폰, 충전기, 여권이나 현금 등은 따로 준비하도록 조언해 준다.
국제공항이라는 공간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입국장과 출국장의 표정은 사뭇 다르지만 그래도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안도의 표정이랄까? 여유로운 모습이고, 출국장에서는 들뜨고 분주한 모습들인데 밝은 표정이 역력히 보인다.
내가 탄 비행기는 오후 늦게 굉음을 내며 활주로를 달려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이내 안정 궤도에 올라 편안한 자세가 되었다.
아들은 다른 일정 때문에 따로 출발해서 두바이를 거쳐 파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행 일정은 15박 16일, 파리, 로마, 이스탄불, 아테네에서 각각 4일 일정으로 잡았다. 얼마간의 시차로 뒤늦게 나타난 아들을 유럽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상봉하게 되다니 벌써 마음이 설레 이기까지 한다. 아들도 역시 그런 마음인지 두바이에서의 있었던 일들을 신이 나서 이야기 하는 가운데 파리에서의 첫날을 보내게 되었다.
파리의 숙소는 몽파르나스 역 근처의 조그만 호텔로 기억된다.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역시 루브르박물관이었다.
파리에 올 때마다 들러 본 곳이지만, 이번에는 유럽 여행이 처음인 아들과 함께였기에 더욱 새로운 기분이었다.
루브르박물관 입장은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데서 입장권을 구매한 뒤 줄을 서서 기다려 들어가거나, 지하철역으로 연결된 카르셀 드 루브르아트쇼핑센터(Carrousel du Louvre Art Shopping)로 입장하기도 한다.
나는 아들을 이끌고 어서 루브르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차례를 지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우리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대별, 장르별로 전시된 작품은 거의 미술교과서에서 많이 본 작품들이었다. 사람들이 특히 많이 몰려 있는 작품은 역시 모나리자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하다가 밖으로 나와 잠시 지친 다리를 쉬면서 다음 목적지를 가기 위해 센 강의 유람선 선착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유람선은 바토무슈라고 하는데 이 배를 타고 에펠탑까지 가기로 한다. 벌써 날이 어두워진 센 강의 야경은 한층 아름다웠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에펠탑은 철 구조물의 전문가인 에펠에 의해서 1887년부터 26개월에 걸쳐 만들어졌으나
그 당시만 해도 흉물스럽다는 비난이 일었으나 지금은 명실상부한 파리의 랜드 마크로 상징 되어 있으며,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몽파르나스 역에서 열차를 타고 렌(Rennes)까지 가서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려 타고 몽생미셸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는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몽생미셸은 수도원이며, 많은 수도원의 성지순례지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밀물 때는 섬이 되었다가 물이 빠지면 갯벌로 변한다. 밑에서 골목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맨 위에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내부를 둘러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서 수도원 입구에 자리 잡은 어느 음식점의 메뉴판을 훑어보고, 식당으로 들어가 주문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아닌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었는데, 허술했던 아침식사로 배도 고프고, 어쩔 수 없이 그냥 먹게 되었으나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식사를 마친 뒤 버스를 타고 렌까지 나와서 열차 시간을 기다리느라 시내의 몇몇 장소를 카메라에 담았다.
아들은 언제부터인지 여행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도무지 관심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왜 그럴까 혼자 생각하면서 가만히 아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았다.
그런데 그저 내 발걸음을 따라 내가 왼쪽으로 가면 왼쪽,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 이렇게 내 발자국만 쫓아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3박 4일의 파리 일정을 모두 마치고 로마로 왔다.
우리는 출발할 때부터 대부분 자유여행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동이나 시간에 큰 제약이 없었고, 다만 바티칸 성당이나 폼페이 관광은 현지 가이드에게 예약해서 관람할 수 있었다.
폼페이로 가는 차량은 대략 10여 명이 탑승했는데 거의 모녀가 함께 여행하는 경우이고, 우리처럼 부자(父子)끼리 여행하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밖에 없었다. 그러니 화제는 자연히 우리에게 쏠리는 것이다. 여행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부자간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아주 특별한 경우란다. 아무튼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을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하며 목적지인 폼페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폼페이는 약 2,000년 전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멸망한 도시다. 화산재로 사라져 버린 이 도시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에 발굴되었는데 발굴 당시의 모습은 화려하고, 당시의 홍등가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은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어 상영되었는데 나는 아마도 중학교 졸업 후였던가? 아니면 고등학교 입학무렵일 때 이 영화를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환락의 도시에서 죽음 앞에 놓인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로 기억되었다.
폼페이에서 돌아온 뒤 다음날은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약 230여km 떨어진 피렌체로 향했다. 피렌체는 15세기 초 메디치가에 의해 시정 권력을 잡으면서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 황금시대를 만들어 간 곳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정(市政)의 중심이었던 시뇨리아 궁전을 비롯하여, 우피치 궁전, 독특한 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 조토의 벽화 등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교회, 도나텔로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 로렌초 교회 등이 있는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았다.
한때 메디치가(家)의 저택이었던 팔라초-피티(궁전)는 현재 미술관이고, 그 밖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름 높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산마르코 미술관 등이 있다.
아들은 역시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처럼 즐거워보이지 않아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의 관점이 달랐다. 그런데다 여행을 떠나 올때 형으로 부터 아빠를 잘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 하루를 온전히 각자 따로 여행을 하기로 하고, 필요한 용돈도 줬다.
3. 아들에게서 받은 첫 편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들은 보이지 않고 머리맡에 한통의 편지가 놓여있어 펼쳐보니 아들이 내게 쓴 첫 편지였다. 편지에는 아버지~!로 시작된다.
아버지~!
아들이 아빠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편지를 써봅니다. 그러자니 무슨 말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다소 긴장되고, 제가 드리고 싶은 제 마음속에 말을 다 꺼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제가 어려서는 일밖에 모르시는 아빠가 어린 마음에도 서운했고 너무 미웠었거든요. 다른 집 아이들은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맛있는 외식을 했다고 자랑하면 저는 그들과 어울려서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엄마 역시 학원 일로 함께 할 시간이 없었으니, 형이나 저나 외톨이 같은 처지였습니다. 아빠는 퇴근해서 집에서 얼굴 뵙기도 어렵지만, 너무 말씀이 없으시니, 아빠에게 감히 말을 건네는 것조차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이후 저희가 판단을 해야 할 때면 스스로 하도록 말씀하셨죠. 지금 생각하면 그 말씀을 존중하지만~~아니 옳으신 판단이고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만, 한때 진로 문제로 혼란을 겪었고, 결국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잖아요. 아빠도 아시는 것처럼 교통사고로 할아버지가 현장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저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 채 가끔 악몽에 시달리곤 했답니다. 그 트라우마는 긴 시간을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편협해지고, 자칫 비뚤어진 사고방식으로 흔들리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형이 저를 붙들어 세웠고, 지금은 아빠의 아들로서도 부끄럼 없이 성장했다고 자신합니다. 역시 큰아들로서 책임감은 '형만 한 아우는 없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형은 우리가 아빠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며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빠가 지금의 저보다 젊으신 나이에 장애인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개·폐회식을 총괄하신 경험이나, 젊은 사람들도 해내기 힘든 800km의 스페인 순례 길을 도보로 완주하면서 3개월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혼자서 해내신 모험정신은 저희로서도 부러울 뿐이었습니다.
아빠~!
이번 아빠와 함께한 여행의 깊으신 뜻을 이제야 깨닫고, 얼마나 부끄럽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에게 자유일정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다리가 부르트도록 걸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술관이나 관광유적지보다는 호텔에 더 관심이 많아서 호텔을 중심으로 관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빠~! 오래도록 건강하세요.
둘째 아들 올림.
4. 라면 한 그릇의 행복
아들이 남긴 첫 번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편지 내용에서처럼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내가 어떻게 간과했었는지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나마 편지를 통해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오늘 아침은 마음이 너무 가벼워 콧노래까지 나온다. 물론 편지이기는 했지만, 아들과 소통이 되었다는 것이 기분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는데 그동안 왜 가족과의 대화에 인색했을까?
머리맡에 커피포트와 라면 1개가 놓여있었다. 오늘 아침은 마지막 남은 라면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그리고 라면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커피포트에 넣고 4분 정도를 더 끓인 뒤 방안에 냄새가 스며들지 않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훌륭한 조찬을 시작한다. 창밖에 둔 무말랭이와 고추장도 꺼내 놓고 곁들여 먹는데 라면도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첫날 트램 정거장에서 숙소를 찾기 위해 지도를 꺼내자마자 중년 신사가 다가와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곳이다. 그래서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지만 친절한 시민들 때문에 여행은 즐겁다.
오늘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브리지를 건너볼 계획이다. 어제 아들과 함께 가본 그랜드 바자르(지붕 덮힌)는 5,000여 개의 상점이 갖가지 물건을 갖추고 손님들을 유혹한다. 바자르에 들어가면 미로처럼 되어 있어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시가지의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원래 물 저장고로 만들어졌는데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전설의 메두사가 머리를 거꾸로 해서 기둥을 받히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아야 소피아박물관 등은 꼭 둘러봐야 하는 곳으로 추천하는 곳이다.
갈라타 브리지는 약 500m 정도의 거리(距離)인데, 트램 으로 건널 때는 몰랐으나 낚시꾼들이 많았다. 신시가지에서는 탁심 광장, 갈라타 타워, 선 셋 야경을 봐야 한다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볼 수는 없었다. 아무튼 터키는 여행의 묘미가 새록새록 매력 있는 곳이다.
5. 여행이 남긴 값진 선물 (소통)
우리는 이날 각자 여행하고 돌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의 밤을 지새운 채 다음날 그리스 아테네로 향했다.
아테네는 나도 처음 와본다.
첫 느낌은 뭐랄까 하얀 도시로 다가왔다. 건물벽들이 대부분 하얗기도 하거니와 그리스는 신화의 나라로 신비감이 들기도 해서일까? 그래서인지 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로 알려졌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신전, 에레크테이온을 간직해 온 약 3,5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 올림피아 스타디온, 근대올림픽의 발상지 신타그마까지 감회가 새롭다.
이 이야기까지는 글이 길어져서 여기서 마치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동안 자녀간의 대화가, 가족간의 대화가 부족한 삶은 행복의 가치관이 그만큼 헐값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 자식들에게 부끄럽고, 이제라도 부자유친 하자고 다짐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