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인식개선신문=최봉혁기자)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수상작 연재] 김보미 매치포인트 - (산문, 뇌병변, 중편소설④-제4경기
매치포인트
김보미
제 4경기.
“준희야, 혹시 야구장 가보고 싶어?”
대환의 질문에 준희는 멍해졌다. 그 질문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이 가고 싶다는 마음인가? 갈 수 있다는 확신인가? 준희가 생각에 잠기자, 대환은 괜한 것을 물어본 것 같아서 얼굴이 붉어졌다.
“가고 싶은지 안 가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왜?”
“갈 수 있는 곳인지 몰라서요.”
준희는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어딘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선택은 가능성을 전제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 중에 뭔가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준희는 자신이 야구장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야구를 보는 것도 좋아하고, 직접 가서 본다면 무척 재미있겠지만 그게 준희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지는 않았다. 준희의 삶은 일방적이었다. 준희쪽이 아니라 세상 쪽에서.
“내가 미리 답사를 해봤어. 지하철로 입구까지 가서 경기장에선 리프트로 움직이면 돼. 화장실도 확인했고. 물론 돌발상황은 생길 수 있어. 네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우리 같이 가볼래?”
준희에겐 가야 할 곳과 갈 수 있는 곳만이 기준점이었다. 가능성으로 선택해본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지금 준희는 중요하고도 새로운 지점에 서 있었다.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을 보내야 하는 때였다.
아버진 여전히 준희의 눈길을 피하고, 어머니와 누나 이야기를 꺼내면 불처럼 화를 내셨다. 삼촌도 무슨 언질을 들었는지 더는 말씀하시지 않고 입을 다무셨다. 마음은 복잡하고 머리는 어지러웠으나 그것만 생각하며 살 수 없었다.
준희는 수만 가지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어디서 무엇이 준희를 당황하게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조심해도 사고처럼 일은 일어나곤 했었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그래, 어차피 그럴거라면. 준희는 결심을 했다.
“좋아요. 생각해보니까 가고 싶어요. 가고 싶은 마음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게 맞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전장을 앞둔 전우처럼 팽팽하게 긴장한 얼굴로 지하철에 올랐다. 수없이 타 봤지만 울렁거리는 진동도, 들려오는 소리도 모두 새로웠다. 준희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임무를 맡은 것처럼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폈다.
할인을 받기 위해 준희의 복지카드를 꺼내고, 계산을 하고, 대환이 미리 알아둔 번호로 전화를 걸어 리프트를 작동시켰다. 경기장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재잘거리는 사람들 속에 준희와 대환도 일행처럼 섞여들었다. 올라가는 방법은 달라도 목적지는 같았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의자에 사람들이 앉고, 휠체어 들어갈 수 있는 특수한 공간에 준희가 앉았다. 아래로는 넓은 경기장이 보였다. 선수들은 몸을 풀고, 캐릭터 인형을 쓴 사람들은 박수를 유도하기 위해 율동을 하고 있었다.
생경한 소란스러움이 준희를 들뜨게 했다. 텔레비전 중계로만 보던 야구를 직접 본다는 기쁨과 야구장에 왔다는 현실감이 준희를 벅차게 했다. 마주치는 시선이 날카로울 때도 있고, 곱지 않은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준희는 난생처음, 조심하는 것보다 도전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 경기는 점수를 내고, 잃고를 반복하며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갖가지 응원 도구들로 소리를 내는 사람들 틈에서 준희는 뭔가를 같이 하는 소속감에 흠뻑 빠져들었다. 어쩌다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은 호의적인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준희도 그들을 따라했다.
홈팀이 홈런을 치면 사람들이 성난 사자처럼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가만히 사람들을 구경만 하던 준희도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보태기 시작했다.
경기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준희는 자신의 심장이 이 순간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좋았다.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준희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보다 먼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경기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예상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지하철로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선생님과 준희는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피해있다가 겨우 막차를 탔다. 준희의 입술이 새파랗게 변해있었다.
“미안해, 이렇게 경기가 길어질 걸 예상하지 못했어.”
대환이 자책하자, 준희가 웃었다.
“너 입술이 새파래.”
“괜찮아요, 선생님. 혈액순환이 안 돼서 그래요. 몸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속상해하는 대환을 보며 준희가 말을 이었다.
“맨날 조심하잖아요. 매일 매일 조심하면서 사니까 오늘 하루쯤은 괜찮아요. 아무리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이라도요. 한 번쯤은 행복하게 뛰어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선생님.”
불시에 준희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병과 함께 사는 것, 그 병이 남긴 장애를 안고 하루를 살아내는 것은 비등한 실력의 상대와 경기를 매일 치르듯 조마조마 한 일이었다.
가파른 긴장과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잠시 찾아온 이 순간을 준희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자신의 심장에 하나쯤은 벅찼던 기억이 있었으면 했다. 행복해서 평소보다 격렬하게 뛰었던 기억을 갖고 싶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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