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인식개선신문=최봉혁기자)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수상작 연재] 김보미 매치포인트 - (산문, 뇌병변, 중편소설) ① 경기1
매치포인트 = 김보미
제 1경기.
방금 백 미터 달리기를 끝낸 사람처럼 숨이 턱 끝까지 밀려들었다. 코로 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물에 빠진 듯 입에서 바람이 샜다. 심장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골백번도 더 상상했던 끝. 죽음이다. 침대에 누운 채로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받지 못하는 사지를 움직이려 용을 쓰다가 준희는 죽었다. 터널에 들어선 것 같은 먹먹한 어둠과 적막을 깬 건 준희의 삼촌이었다.
“준희야. 삼촌 들어간다.”
삼촌은 준희의 목 뒤로 팔을 집어넣다가 겁에 질린 준희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꿈이냐? 망할 놈의 악몽 질기기도 하다.”
마저 무릎 밑으로 나머지 팔을 집어넣은 삼촌이 무릎을 굽혔다가 펴는 동시에 준희를 일으켜 단번에 전동휠체어로 옮겼다. 준희는 목 아래로는 어떤 부분도 움직일 수 없는데 신이 최소한의 자비를 베푼 것처럼 손가락 몇 개가 마비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한 근육병은 준희에게 영구적인 장애를 남기고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직은 뛰고 있는 심장이라는 근육도 언제 멈춰버릴지 모른다. 언젠가 준희를 담당하는 의사는 준희의 상태를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라고 했다.
그래도 손가락 몇 개가 남은 덕분에 전동휠체어나 핸드폰 정도는 준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은 될 수 있으면 잊어버리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에 마음을 기댄 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살았다. 자고 일어나고, 출근도 했다.
가까이 사는 삼촌이 아버지를 도와 출근할 채비를 해주시면 준희는 밤새 겪은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고 말끔해진 얼굴로 활동 보조 선생님을 만났다. 활동 보조 선생님은 지하철로 준희의 출퇴근길을 함께 해주신다. 그 외에도 복지센터나 공공기관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한 몸처럼 움직인다.
벌써 3년이나 인연을 맺어 꽤 친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준희는 지난밤 죽었다 살아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근육이 마비되어 결국은 심장이 멈추면 죽게 되는 희귀한 근육병 환자에게 그런 악몽은 일상이지만 선생님에게는 아침 기분을 망치는 이야기일 것이다.
“준희야, 안녕? 날씨가 많이 풀렸다.”
선생님은 그간 만나본 활동 보조 선생님 중 가장 친절한 분이셨다. 그래서 준희가 오랫동안 같이 하고 싶다고 아버지와 복지사님께 말씀드렸다. 제대 후, 복학하신 선생님은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 삼아 활동 보조 일을 하신다고 했다.
준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장애인 취업 연계프로그램을 통해 사무직으로 취직했다. 스무 살. 선생님과 같은 비장애인이라면 대학교 1학년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저절로 떠오르는 상념을 애써 무시하며 준희가 선생님께 손가락을 움직여 보였다.
회사 정문이 보이면 혼자 들어가고 싶은 준희 때문에 선생님은 곧 돌아선다.
“저녁에 다시 만나자. 오늘도 기분 좋게 파이팅!”
아침 햇살 아래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선생님은 단단하고 건강해 보인다. 활기차다고 할까. 준희는 90살 먹은 노인처럼 선생님의 빛나는 젊음을 느릿느릿 구경한다. 지하철 계단을 단번에 타다닥 내려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준희가 가까스로 회사에 들어선다.
준희의 자리는 비품이 들어 있는 캐비닛 바로 옆이다. 필요한 물건 가까이 앉을 수 있게 배려받은 것이다. 회사 사람들은 최대한 준희를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며, 일정한 거리에서 준희가 기분 나빠하지 않는지 관찰하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가령 얼굴도 보지 않고 큰 소리로 “김 대리, 이것 좀 해줘!” 하는 일이 준희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준희 앞까지 와서 준희가 할 일이 너무 많지 않은지 세심하게 확인한 후에 거의 부탁하듯 일거리를 준다.
준희는 복지관에서 텃세 당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심한 따돌림이나 거친 일은 당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준희는 손가락을 움직여 문서를 시키는 대로 옮기고 저장한다. 어렵지는 않지만 실수하면 다른 사람의 일거리가 되기 때문에 두 손 가지 않게 하려고 집중한다.
“속도가 안 맞으면 말해줘요. 물 먹고 싶어도 말하고요.”
점심 식사는 직원들이 번호를 정해 돌아가며 도와준다. 당번이 된 사람은 매번 같은 말을 한다. 밥이나 반찬이 들어가는 속도가 알맞은지, 목이 막히지는 않는지 물어본다.
따뜻한 말투에 준희는 눈가에 뭔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지만 무시한다. 여기서 준희가 울기까지 하면 돌이킬 수 없게 어색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명랑한 목소리를 꾸며 아주 알맞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상대는 얼굴을 반쯤 구부려 웃는다. 그렇게 준희와 직장동료는 서로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누구나 그렇듯 직장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적어도 쓸모없는 존재는 되지 않기 위해 애쓰다 보면 퇴근 시간이다. 선생님과 함께 집으로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 백화점에서 저녁을 먹는 것 정도가 준희의 나머지 일과다.
다른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복지관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 것마저도 백화점으로 고정이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고, 장애인 화장실이 있으면서 교통도 편리한 곳은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만날 때마다 백화점에서 거의 같은 메뉴를 먹으면서도 준희와 친구들은 무엇을 먹을지 하릴없이 고민한다. 어차피 갈 수 있는 식당은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퇴근길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건 평범이라는 옷을 잠깐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휠체어가 반갑지 않지만, 함부로 내칠 수도 없는 음식점 직원들은 울상이 되어 준희 무리를 가장 후미진 식탁으로 안내한다. 창고 바로 앞 테이블이나, 화장실 옆자리가 예약이나 한 것처럼 늘 준희네 차지가 된다.
그래도 준희와 친구들은 불평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세상이 좋아져서 전동휠체어라는 게 발명되어 외출할 수 있게 되었고, 장애인이라고 내칠 수 없도록 법이 바뀌어서 식당에도 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삶이 스포츠라면 준희가 치르는 경기는 단조롭다. 숨 막히는 위기도 없고, 짜릿한 역전도 없다. 같은 속도의 랠리가 지루하게 이어진다. 스매시를 날리는 사람도, 결정타를 치는 사람도 없는 준희의 하루는 다시 삼촌을 만나면서 마무리된다.
아버지와 삼촌이 힘을 합쳐 준희를 씻기고 침대로 옮겨주면 잠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그게 전부다. 얼마 전부터 준희는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저녁을 먹지 않는다. 먹는 양이 많지 않음에도 자꾸만 체중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점점 대사장애가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준희가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길은 이것뿐이다. 저녁을 먹지 않고 배고픔을 참는 것이 전부다.
준희는 삼촌에게 악몽을 꾸는 것이 괴롭다고 울부짖고 싶지만 참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삼촌의 눈인사에 그저 눈짓으로 대답한다. 하루에 두 번 집으로 찾아오는 삼촌에게 아버지가 얼마간 사례를 하지만 얼마를 드리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다만 대청소를 하듯 날 잡아 목욕탕에 가는 날엔 삼촌이 좀 더 생각해달라고 하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금전적인 보상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아버지는 조금만 무거운 것을 들어도 금방 숨이 찬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다고 했다. 그러니 삼촌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준희를 둘러싼 관계가 금전적인 대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길게 생각하면 별로 좋지 않다. 삼촌도 활동 보조 선생님도 준희에게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꼭 필요한 일을 도와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그러니까 생각은 그만. 아무리 악몽이 무서워도 이젠 자야 한다.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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