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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4주년김영옥 대령은 누구? 미 오바마 행정부 박동우 전 차관보의 증언

최봉혁 | 기사입력 2024/05/20 [00:09]
2004년에 미국 이민 100주년 선정 이민 영웅
미국을 있게 한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

6·25전쟁 74주년김영옥 대령은 누구? 미 오바마 행정부 박동우 전 차관보의 증언

2004년에 미국 이민 100주년 선정 이민 영웅
미국을 있게 한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

최봉혁 | 입력 : 2024/05/20 [00:09]
 

▲ 김영옥대령을 기념하는 고속도로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6·25전쟁 74주년김영옥 대령은 누구?
 
김영옥 대령의 전쟁이후의 삶
 
미국LA에서 살고 있는(전) 미 오바마 행정부 정책위원회 박동우 차관보가 6.25 74주년을 맞이해서 기고문을 본지에 보냈다.
 
본지는 박동우차관보의 기고문과 미국에서 발간한 미전쟁영웅 김영옥대령의 책을 전자책으로 출판 하기로 했다.이에 뜻을 맞추어 미국 교포사회에서 김영옥대령과 생전에 교민사회의 취약계층을 지원해온 박차관보의 이야기를 보도한다.
 
[전문]
6·25전쟁이 74주년이 다가온 가운데 미국 최초 유색인종 대대장 김영옥 대령이 재조명 되고 있다.
김영옥(1919~2005) 미국 육군 대령은 재미교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제대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인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했고, 미 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도 활동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공세로 소양강 지역을 방어하던 31연대가 철수하자 미군과 한국군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아 적을 저지하기 위해 후퇴하는 중대급 한국군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같은 해 5월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이어지자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직접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들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르게 진격해 제일 먼저 캔자스선(임진강~양양을 연결한 유엔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후 철의 삼각지대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중 중상을 입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돼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에 복귀해 1952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2005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2018년  3월, 2005년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대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샤론 쿼크-실바의원 주도로 최석호 의원과 한인 밀집 거주지인 오렌지 카운티 북부 지역의 5번 프리웨이구간을 ‘김영욱 프리웨이’로 도로명을 명명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의했으며 7월 이 결의안이 상의원 40명 중 34명이 참석한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로 미국 최초 한인 도로명이 명명 됐다.

▲ 김영옥대령 기념고속도로에서 박동우 미 오바마 행정부 차관보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한편 김영옥 대령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으로 전쟁에 참전해 이탈리아 – 프랑스 해방의 주역이 되어 두 나라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 후 제대했지만,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바로 자원입대를 하고 한국으로 오게 됐다.
1951년 4월에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정보참모로 임명되었으며 31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며 김영옥 대령의 활약은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 후 소령으로 진급과 함께 1대대 대대장이 되어 미 육군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 대대장이 되어 ‘불패 신화’를 일구며 전쟁영웅으로 불렸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최전선을 지키며 직접 고아원을 설립해 수백 명의 전쟁고아를 돌보았으며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다방면으로 사회봉사를 이어나갔다. 
 
또한 미군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일본군 위안군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서기도했다.
국내에서도 진정한 영웅인 그의 업적을 잊지 않기 위해 경기도 평택에 들어선 새 유엔사령부·주한미군사령부 본청작전 회의실을 ‘김영옥 회의실’로 명명하며 별도로 주한 미군사령부 본부 건물 하나를 ‘김영옥 빌딩’으로 명명했다.
 
-김영옥 대령의 약력 
 
미국에서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 가장 뛰어난 군인 으로 꼽히는 한국인이 있다 
 
마크 클라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이 자신이 거느렸던 50만 군인 중 최고로 꼽았던 그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미국 정치권을 움직여 일본을 세계적인 망신거리이며 전락시켰다  
 
지난 2016년 한국 사회는 전 년까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 에 수록되었던 한 인물이 돌연 삭제 되면서 큰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삭제를 결정한 측에서는 첫째 이후로 한국의 차세대 역할을 해야 알아 이들이 왜 미국인을 배워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들었고 둘째 이후로 미군 장교 출신이 6.25 전쟁에 참전한 점이 문제된다 
 
일부 편찬 위원들의 의견이 반영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삭제 된 이후에 공통 분모가 미국 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미주의 자들이 편찬 의원의 포함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불 공정성에 문제가 불거졌었다.
 
한때는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할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이 이제는 id 레벨 필요가 없는 인물로 여겨지면서 삭제 됐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고 삭제 되기도 한 이 인물은 미국의 전쟁 영웅이자 나치 독일이 히틀러와 맞서 싸운 유일한 한국인 김영옥대령이다.
 
지난 2011년 msn 닷컴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 인을선정했다. 미국 독립 전쟁 과 제 2 차 세계 대전 걸프 전까지 미국 역사의 시작부터 현대까지 미국을 있게 한 최고의 전쟁 영웅 16명을 선정했는데 그 순서에 열 세번째  영웅은 한국인 김영옥 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전쟁의 총 사령관 조지 워싱턴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이 던 로버트 리 제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 그리고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할 수 없도록 하는 평화 헌법 초안을 작성한 인물이자 한국 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으로 잘 알려진 더글라스 맥아더 까지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인물들 사이의 담당하게 김영옥 일하는 한국인 이 포함된 것에 그 역시도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많아 전쟁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세계 많은 국가들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모조리 받았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특별 무공훈장 은성 무공훈장 동성 무공훈장을 수여 했는데 그가 받은 특별 무공훈장 은 미국 최고 무공훈장을 알려진 명예 무공훈장 에 이어 품격있는 현장으로 미국 사회가 그를 얼마나 존경하는 지 단적으로 증명한다 
 
이탈리아 정부의 무공훈장 프랑스 정부의 내 정든 에르 무공훈장 한국정부의 태그 무거운 장까지 그가 받은 훈장 만 전부 합쳐도 19개 이다 모두 전장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받았다.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여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상 하원에서 전부 만장일치로 통과 하는 역사적인 일이 탄생한것이다
 

▲ 김영옥대령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독일이나 일본 이나 둘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인 것은 같지만 독일은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성의를 다해 사과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반면 일본은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에 대 사과는커녕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 피해를 입은 많은 국가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러한 결의안이 통과되면 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위해 이 결의안을 발의한 건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코 혼다 하원의원 이다 
 
그래서 이를 혼다 결의안이 라고도 부른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이런 결의안을 발의한 것도놀랄만한일인데 이를 발휘한인물이 일본계 3세 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더욱 놀라운것은 이 결의안의 지지 의사를 표명한 인물들이 전부 일본계 참전용사의 소속이라는 점이다 
 
원래 이 결의안 발의 계획이 알려졌을 때 잼 일본 사회 지도자들은 혼다 의원 에게 상당한 압력을 가했지만 이 결의안에 지지 서명 안 이들이 일본계 참전 용사 에 어른들이 라는 말을 듣고는 결의안 반대를 철회했다 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계 참전 용사 외는 재미 일본사회의 자부심이 자 정신적인 지주 드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일본계 참전 용사 회를 움직인 인물이 바로 김영옥 대령 이다 
 
일본계 참전 용사 회 절대적인 지도자 로 군림했던 인물이 바로 김영옥 대령 인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일본에게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알려지자 전 세계 곳곳에서 관심을 보였다 
 
우선 미국에서는 김영옥대령 이라는 전쟁영웅이 지지하는 결의안으로 알려지자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35명 의원들이 의 단숨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 언론들은 이 결의안은 일본과한국의 문제가 아닌 평화와 인권 여성의 문제를 인식하면 매일같이 기사를 쓰기 바빴다. 
 
그렇다면 김영옥 대령이 라는 인물은 직접 이 결의안에 참여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일본계 참전 용사 회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스토리는 1943년 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영옥 이라는 인물은 독립운동과 김순권 의 아들로 당시 김 순과 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LA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에서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는 친형제처럼 지냈다고 알려졌다 그렇게 미국에서 자란 김영옥이 스물한 살 되던 해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합니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그동안 관망만 하던 미국이 일본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 미국을 위해 육군의 사병으로 지원했으나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아시아인 에 대한 차별이 심각했습니다 이는 군에서도 예외는 없었죠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그는 조지아 주에 있는 육군 장교 후보생 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졸업후 배치 받은 곳은 100대대 라는 부대였다 그런데 100대대는  특이하게도 대다수 병사가 일본인계 미국인이었다 
 
1942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면서 미국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 전부를 특별 수용소에 억류 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리고 11만 명에 이르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전부 수용 서로 강제 이주시킨 후 남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에게 충성심을 증명 하도록 강요했고 결국 반 강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원래 미육군은 1대대 2대대 3 대대로 편성 하지만 김영옥 의 배치 받은 100대대 이름만으로도 특이 했다 뭔가 특수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랬다 일본계 미국인들이 혹시 스파이 행위를 할까 싶어 그 부대를 연대도 없는 독립 대대로 모두 편성 시켰다.
 
1943년 2월 김영옥은 후보생을 마치고 장교로 임관한 후 100대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당시 대대장 는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면서 자네가 더 원한다면 다른 부대로 보내주겠다 "고 말했죠 그러나 김영옥은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부대원들도 일본인이 아니다 라 면서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 며 미국을 위해 싸울 것이다"라고 답했다
 
어쨌든 미국이 일본 개의 스파이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100대대는 김영옥 의 지위를 받아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 이탈리아 전선으로 투입됐다 
 
그의 100대대는 당당하게 성과 로 인정 받겠다 며 모든 전투에 목숨을 내 걸었으며 죽을 때까지 올인 한다는 의미의 go for broke !를 부대구호로 썼다.
 
미 국방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심각한 부대상을 입은 병사에게 는 퍼플 하트 훈장을 수여 하는데 김영옥 의 100대대 가 얼마나 격렬하게 전투에 임했던 미군 내에서는 100대대 를두고 퍼플 하트 ( Purple Heart)부대 라고 부를 정도였다. 
 
결국 일본계2세를 이끌고 김영옥 100대대가 참가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는데 이 과정에서 김영옥은  군부대원보다 선두에 서서 솔선수범 했다 그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고 항상 큰 형처럼 부대원들을 대했으며 모든 부대원들은 김영옥 을 진정한 리더로 존경했다. 
 
자신들의 조국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로 철저하게 유린하고 있을 때도 김영옥은 모든 일본인 부대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신적 지주로 존경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생사를 수 없이 넘나드는 경험을 했다면 보통 참전 용사로 남은 여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보내는 것이 보통 사람의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달랐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는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됐다. 그런데 김영옥은 내 조국 한국을 위해 또 한번 전쟁에 참전하는 애국심 발휘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맞서 싸운 것도 모자라 5년 뒤 또 한번의 치열한 전쟁터로 조국을 위해 참전한것이다.
 625 전쟁에서도 김영옥은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마치 불사신 처럼 기어코 한국을 지켜냈다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한국을 위해 목숨을 걸어 준 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1999년 캘리포니아주 의회에 결의안을 준비하면서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은 일본인들 특히 미국에 뿌리를 내린 채 미국내 일본인들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협박은 물론이고 일본 정부의정치적 로비를 지원받으며  결의안에 채택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혼다 의원 이 찾아간 인물이 바로 김영옥대령 입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참전용사들에게 영향력이 큰 김영옥대령이 움직여 준다면 탄력을 받겠다 싶었던 것이죠 그때 김영옥 은 노구를 이끌고 자신이 이끌던 부대원이 모인 일본이 참전용사회 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가 제 2차세계대전에서 무엇을 위해 싸웠냐고 반문한 뒤 이 결의안은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인 싸움이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연약한 여성 들에 인권 문제 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말 한마디는 일본계 참전용사들의 가슴을 흔들었고 결국 그들은 전부 마이크 혼다의원을 도와 재미 일본인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2015년까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를 소개됐던 김영옥 대령은 미국인 이라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그런데 김영옥 대령은 미국에서 태어난 완벽한 미국인이었지만 자신의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전쟁후  PTSDFH 병으로  매일이 악몽 같았던 상황에서 다시 한국전쟁에 참전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저지른 참혹한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부하였던 일본계 참전 용사 회를 설득해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리에게 국적이란 태어난국가를 의미하지만 김영옥 대령에게는 마음속에 또하나의 국적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며 다시 교과서에 채택되기를 바란다.
 
소수계 청소년을 돕는 비영리 단체를 운영했고,한인 청소년회관 LA 지부 이사로 활동을 했고,빈민 구제 기관의 이사장을 지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보호소의 이사장,미국 최대 소수계 비영리 보건 기관인 '한인 건강정보 센터' 창립 공동 이사장도 역임했다. 
 
2003년에는 한미박물관 창립하였고 뽑히기도 했다.
 
2005년 12월 29일 미국 LA에서 서거했다. 
 
당시 한국 태극무공훈장 및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무공훈장도 수여받았다. 
 
비록 고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고국의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봉사를 하다 간 이런 분이 영웅이 아니면 누가 영웅이겠습니까?
 
MSN이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에도 포함된 김영옥 대령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박동우차관보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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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우 전·미 백악관 장애정책 차관보 "꼭 할수있다는 의지만 있으면 할수있다"dpi1004.com     ©장애인인식개선신문

 
2013 ~ 현재   수석 보좌관, 샤론 쿼크-실바 켈리포니아 주 5선 하원의원   
 
현, 통일부 엘에이 해외 지부 통일위원회 부회장 
 
현, 남가주 함경남도 도민회 고문 
 
현, 미 엘에이 재향군인회 이사
 
2009 ~ 2013   (전) 미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장애정책위원 (차관보급, 오바마 대통령 임명, 미 상원 인준)   ~ 국위 선양
 
2006 ~ 2012   (전) 가든 그로브시 도시계획위원   
 
2013   충북 제천시 홍보대사 임명   
 
2013   자랑스런 한국인 상 – 사단법인 청렴 코리아   
 
2012   2012년을 빛낸 도전 한국인 특별상   
 
2011   대한장애인 올림픽위원회 고문 위촉   
 
1999 – 2022  민주 평통 자문위원 -  12기, 17기 제외
 
1997 ~ 2017   가든 그로브 자매도시협회 전 회장(2번),    
 
1997 ~ 2015   가든 그로브 로타리 클럽 회원, 2005년 회장, 국제 봉사위원장 역임   
 
1999 ~ 2004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명 자문위원   
 
2000 ~ 2007   (전) 오렌지 카운티 교통국 자문위원   
 
2001 ~ 2005   (전) 오렌지 카운티 노인국 커미셔너   
 
2005 ~ 2006   (전) 오렌지 카운티 한인회 이사장   
1997 ~ 2010   오렌지 카운티 한인회 – 부이사장, 부회장, 봉사센타위원장, 이사 상임자문위원등으로 봉사   
 
1999   남가주 장애인 연합회 회장   
 
1985   물덴동산 장애인 재활협회 회장   
 
1985   남가주 총대학생회, 고문   
 
2013 ~ 현   켈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수석보좌관   
 
2004 ~ 2010   F&M BANK, VICE PRESIDENT (부 지점장/대출부장)   
 
1978 ~ 2004 AT&T근무, 1997 - 2004  홍보 국장 역임
 
1988년 – AT&T 전화 통신회사에 한국어 서비스 센타 개설, 센타 책임 운영함 – 한인 직업 창출과 한인 광고업계 언론계의 광고 유치 혜택 제공  
 
1989년 한국 IMF, 2009년 한미 FTA 조기 인준 등 2번 모두 풀뿌리 운동과 공공외교를 통해 협조함.
 
6.25 전쟁 희생 미군용사 참전비 2021년11월11일 건립, 켈리포니아주 풀러톤시에;
 
36,591명의 6.25 전쟁 희생 미군용사들의 이름을 모두새겨 기리는 미국내 최초의 기념비 건립
 
2009년에 오바마 대통령 장애 정책 차관보 임명으로 와싱톤 디씨, 링컨 공원 한국전 기념비 방문하여 단 1명의 미군 희생 용사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것을 보고 36,591명 이름을 모두 새겨 기리는 해외 보훈 사업을 착안, 별 5개 모형 디자인하고 기념비 건립 장소 확보하였고 기념비 건립 기금모금 아이디어까지 내어 2021년 11월 11일에 준공함.
 
2022년, 풀러톤시로 부터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옴부즈맨으로 임명받아 지금까지 그리고 지속적으로 한국전 참전 희생하신 36,591명의  희생 미군 용사들의 명예를 위해 노력하고 있슴.
 
켈리포니아 주 예산에서 한인 사회를 위해 의원님을 통해 기금 유치, 공적
 
1998년 - $25만불 한미 박물관 기초 기금 유치 ( 길버트 세디요 주 하원의원을 통해서)
 
2003년 – 한인 노인 마당발 버스 프로그램 유치 1. 17인승 버스 2대 2. 기사 봉급, 휘발유, 차량 유자비 등의 기금 매년 확보(2023년에는 $12만 5천불 기금 배당받음) 3. 2036년까지 계약 연장
 
2019년 – 한미 역사 박물관 건립 기금 $4백만불 유치 ( 샤론 쿼크-실바 주 하원의원 통해서, 산티아고하원의원,  두라조 & 미첼 상원의원과 함께)
 
2020년 – 오렌지 카운티 한인 회관 건립에 $10만불 유치 ( 샤론 쿼크-실바 주 하원의원 통해서)
 
2023년 – 코리안 복지 센타에 $1백만불 유치 ( 샤론 쿼크-실바 주 하원의원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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