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14> 모래
<14> 모래
무오년 1월, 모든 관작을 삭탈당한 나는 북으로 가는 유배길에 올랐다. 몇 고을을 지날 때면 그곳 관리들이 나와 예를 차려주었고, 멀어진 심처의 소식을 내게 알려주었다. 대비는 숨을 보전하였으나 결국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몸이 다시 굳어 몹시 아팠다. 굳은 반신이 통증으로 나머지 반신을 탓해오기 시작했다. 또 몇 고을을 지날 때면 그곳 선비들이 나와 울었다. 이 울음은 다시 조정으로 향하는 언어가 될 것이다. 길에 나와 있는 그들에게 울음이 언어일 수 있으나 늘 경계하여 토할 것을 당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늙은 죄인은 참았다. 선왕은 과거 스무 차례 넘게 선위를 수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임금은 그보다 많은 차례 서청에서 중죄인을 친국하였다. 벌하여지는 죄인이 많아질수록 조정의 색은 선명해져갔고 임금의 눈은 선왕의 그것처럼 사뭇 선병질적으로 변해갔다. 선왕이 늘 불안을 바퀴로 삼아 수레를 끌었다면, 임금은 스스로 그 불안을 집어삼키고는 제 두 발로 사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더 죽어질 것이다. 죽어야 할 것이다. ― 북으로 가는 길에 계절이 맞지 않음을, 내 경과 함께 안타까워하오. 길에 오르기 전날, 늦은 밤 임금이 죄인의 옥사로 찾아와 말을 꺼냈다. ― 멀지 않은 날에 경의 향으로 보내 주리다.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죽어서 살라는 임금의 마지막 명을 나는 퍽 달게 받아들였다. 겨울비가 내렸다. 어느덧 함거는 강원을 지나 철령의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소리에도 차마 묻히지 못하는 음성들이 귓전을 스쳤다. 함거를 끄는 포졸의 숨소리가 사뭇 거칠어졌다. 가파른 고개 앞에서 길을 여는 금부도사의 말도 지친 소리를 내었다.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탄의 발걸음도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모두가 내리는 것을 맞고 있다. 맞으며 오르고 있다. 비가 내리고부터는 여기 있는 누구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길로 바빴다. 다만 비 내리는 이 높은 고개에서 그 길의 방향이 모두 같았을 뿐이다. 지금 거친 숨 몰아쉬고 있는 모두는 허깨비가 아닌 실체였기에 하염없이 이 시간을 맞아야 했다. 원루를 흘려보내는 구름을 바라보자 세찬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것이 바람에 실려 구중심처로, 조정으로 가기를 바랐다. 허깨비를 지워주기를 바랐다. 색을 지워주기를 바랐다. 비는 계속 내렸다. 이윽고 고개의 끝에 올랐다.
함거는 철령의 한 봉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나는 탄을 불러 이제는 포천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금부도사는 자리를 비워주며 전언의 시간을 허락해주었다. 벼슬을 핑계로 향의 소식을 가까이 하지 못하던 젊은 날, 흉년이 들 때면 작고 조용한 구휼이 그곳에서 몇 번이고 행해졌음을 뒤늦게 들었다. 한음이 죽고, 이제는 그의 포천 외가로 거두어진 여종을 통해서였다. 그의 부인이 자결 전 자식들을 맡긴 바로 그 여종이었다. 부인이 과거, 종을 아껴 몰래 글을 가르친 듯했다. 여종은 다시 써서 보내는 일은 서툴렀으나, 내가 써 보낸 부탁의 뜻은 모자람 없이 알아차려 바람대로 해주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한음의 외가를 살피는 일을 자주 부탁하였다. 언젠가부터 그녀가 보내오는 문언에서 글이 깊어짐을 느꼈다. 문장이란 시간만으로 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사람의 흔적을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문언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일체 없었다. 종에게, 여자에게 감히 문장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조용한 구휼과 말 없는 문언 그리고 더해진 문장을 헤아려보았다. 여종을 통해 나는 임진년 큰여울에서 만났던, 그 객줏집 여인의 존재를 짐작하였다. ― 의녀라 불러 마땅한 여인이 있다. 남은 한쪽의 몸이 더욱 무거워졌다. 북청에 닿고 나면 다음 겨울은 맞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녀석이 길을 틀어야 할 시간이었다. ― 아들 성남에게도 몇 번이고 일러둔 일이다. 내 몫의 가산은 탄, 너의 책임으로 넘길 테니 의녀를 찾아 그가 행하는 일에 보태도록 하라. ― 대감, 아직 모실 길이 멀고 험한데……. ― 남정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아녀자가 본다. 벼슬아치가 행하지 못하는 일을 그네들이 행한다. 이것을 깨닫기에 조선은 소천지고 사내들은 소인배들이다. 더욱이 벼슬하는 내 자식들은 이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여 네게 부탁하는 것이다. ― 대감……. ― 의녀를 돕되, 큰여울의 깊은 물처럼 일은 필히 조용히 행하라. 소리 없고 물 깊은 나의 향은 사람도 적어 서로를 쉬이 살피는 곳이다. 고로 탄이 다시 돌아가 묵으면, 노인의 오랜 종이 이제는 머물지 않고 아주 살기 위해 온 것임을 머지않아 그네들도 알게 될 것이었다. ― 고단하구나. 이만 가거라. 그를 보내주었다. 궐에서는 익살의 가면을 쓰면서도 가까운 종에겐 오랜 세월 주인의 못난 진면만을 지독하게 보게 한 것이 사뭇 미안해졌다. 익살을 갖고 살라는 말을 끝에 곁들일까 잠시 고민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입이 찢어진 종에게 끝내, 참 웃음을 쥐여주지 못한 주인으로 남았다.
봉은 높았다. 높아 절을 올리기에 알맞았다. 노신이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예를 살폈다. 그리고 경을 향해 절을 올렸다. 마비된 반신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한쪽 무릎이 움직이지 않는 석탑 같았다. 하나를 잃은 나머지 하나의 시간은 이런 것이다. 절을 마치고 한차례 긴 숨을 몰아쉬었다. 색을 갖지 않기 위해, 재치가 갓이고 익살이 부채이던 앞날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그것이 나의 진면이 아님을 알던 이가 한음이었으나 외려 그때는 곁에 그가 없었다. 한음이 이 소천지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객이 되었을 무렵, 익살이란 것을 내가 아주 놓아버린 무렵 나는 온전히 시름을 앓기로 하였다. 시름만을 앓는 일은 차라리 편한 것이었다. 오래된 가면을 벗어던지니, 몸은 풍으로 굳어갔어도 마음은 한껏 자유로워 동강의 노인으로 살 수 있었다. 하여 벗을 잃은 후에 보낸 세월이 외려, 그가 곁에 있음을 현현하게 실감하는 시간이 되었다.
함거에 새 한 마리 날아들었다. 백비둘기였다. 나무 창살에 앉은 녀석의 몸을 내 흐릿해진 눈으로 살폈다. 원래 저의 것으로 가진 것인지 혹은 무언가 더 묻어 있는 것인지 유난히 희뿌연 녀석의 바람칼을 보니 그 색이 마치 새벽을 밀어낼 때의 돋을볕을 보는 듯했다. 만져 손으로 살피고 싶었으나 그리하지 않았다. 녀석을 보며 나는 내 향 협곡에 자리한 폭포를 떠올렸다. 폭포 뒤 동굴에 낭을 틀고 무리 지어 살던 백비둘기 떼를 떠올렸다. 하여 녀석을 향에서 온 것이라 여겼다. 어쩌다 높은 북녘의 고개에 닿았는지 묻고 싶었으나, 관두었다. 그저 불어오는 것에 실려 온 날개 앞에서 길의 이유는 찾지 않기로 했다. 백비둘기는 다시 실려 가려는 듯 몸을 살피더니, 창살을 박차고 번쩍 위로 올랐다. 오르는 녀석의 몸에서 허옇게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큰여울의 고운 모래 같았다.
추위가 조금 누그러지자 희미한 졸음이 등을 감싸왔다. 나는 날개 없는 육신을 함거에 기대어 눈을 감고, 가만히 큰여울을 생각하였다. 여울의 모래밭, 볕 닿는 자리에 깃든 낮의 적요를 생각하였다. 물소리 낮게 들려오고, 꺾인 여울의 어귀를 휘돌아 가면 그 아래서 벗님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듯하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몸의 죽은 쪽 옷매무새가 흐트러졌으나 굳이 깃은 여미지 않았다. 함거는 다시 움직였다. 나는 나의 자리로 향했다. 끝. <저작권자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