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10> 반신<10> 반신
김제남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대군의 후사를 부탁한다는 선왕의 유명을 받았던 신흠 그리고 정협, 박동량, 한준겸…… 이정구, 황신, 김상용…… 무수한 이름이 함께 죽거나 고형을 당하여 없는 이름이 되었다. 하여 실각한 서인의 수가 일흔이 넘었다. 상황을 모르고 궐내의 공포만 어렴풋이 느낄 뿐인 대군은 결국 유배길에 올랐다. 제 작은 몸피 주변의 산만한 흐름을 놀이로 알기에는 많은, 그러나 물음을 이해하기에는 보다 어린 고작 여덟의 나이였다. 강화로 가는 열에서 말의 등이 그 키보다 배는 높았다. 어미를 찾는 울음이 오래고 계속되었다. 대비는 몸이 묶여 그를 보지 못하니, 다만 멀리서 우는 소리를 짐작할 뿐이었다.
……전하, 강화의 울타리를 거두어 주소서…… 거두어 주소서…… 대비전의 담을 물러 주소서…… 물러 주소서, 전하…… 일을 다시 살펴 주소서…… 전하…… 전하……
여남은 수의 신들이 편전 앞에 거적을 깔았다. 거적 위에 무릎 올린 얼굴들을 살피니 남인이 많았다. 다른 당파처럼 실각할 머릿수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그 무리에서 또 사람이 나왔다. 하나같이 젊은 자들이었다. 같은 남인인 한음은 나서지 않았다. 그가 영의정이란 자리의 무거움에 짓눌릴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한음은 시기가 이른 것을 알아, 그들의 무효함을 알아 자신을 후일에 쓰기로 하였을 것이다. 그가 나서지 않았기에 거적들은 오래지 않아 편전에서 사라졌다. 답답하고 말 없던 사헌부 선비의 거적도 같은 날에 사라졌다. 빌렸던 말을 갚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굳기에는 아직 젊은 무릎들이 스스로의 무효함을 몰랐을 리는 없다. 반신이 부쩍 무거워진 나는 그 일로 나의 늙음을 또 한 번 알았다. 큰일을 치른 후의 궐은 조용하였다. 뜻을 받아준 임금 앞에서 이이첨과 대북은 다시 몸을 낮추었기에, 편전에서 또렷한 것은 정사를 보는 임금의 목소리뿐이었다. 한음은 대군의 숨을 구함과 함께 재상직의 사직(辭職)을 하나의 상소로 청하였으나, 임금은 재상의 글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해 여름, 나는 자주 아팠다.
대비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성을 질렀다. ― 인륜을 모르는 군왕이 정사를 논하고 있구나! 차대에 참석해 있는 편전의 신들이 그를 임금과 함께 들었다. 사람으로 싼 대비전의 담을 그녀가 넘은 것은, 갈리어 예기가 된 비녀로 인한 일임을 후일에 전해 들었다. 문이 닫혀 보지 못했으나 대비는 고성을 지를 때까지 예기를 제 목에 갖다 대고 있었을 것이다. ― 선왕이 붕어하던 날, 대군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하여 내 주상에게 국보를 주었다. 어찌 그를 어겨 어미를 능멸하는가! 귀로만 듣기로는, 감정 앞에 법도를 놓아 온전히 악에 받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 또한 오랜 세월 왕가의 사람으로 살았기에 말을 쓰는 법을 알았다. 대비는 신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 임금이 듣게끔 하여 말의 효용을 높였다. 밝은 대낮, 정무를 보는 자리에 행한 것 또한 퍽 적확하였다. 시기는 뚜렷지 않았으나, 강화에 위리안치된 대군은 결국 그곳에서 죽을 것이었다. 임금이 한음의 글을 버린 것을 듣고는, 대비는 죽음의 집행이 곧 치러질 것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하여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미는 그 울음을 대비전에서 모두 털어내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담대한 마음으로 비녀를 갈아 이리로 왔을 것이다. 항시 어미에게는 자식을 위한 뒷일이 있는 법이다. 그 이치가 왕실이라 하여 달리 통할 것은 없었다. ― 기유년에 임해를 주상 네가 죽였음을 궐의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친계의 형을 죽이더니 이제는 이복의 아우도 죽이려 드는가. 다음은 누구인가, 바로 이 어미인가? 주상, 너는 죽어 선왕을 뵈는 일이 두렵지 않은 듯하구나! 자식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후일을 도모하는, 아주 냉정히 계산된 처사였으나 대비는 머리가 차갑지 않은 척 외려 더욱 실성한 듯 소리를 질러대었다. 한 나라 사직의 모성을 이은 여인다운 현명함이었다. ― 패륜이 본디 주어진 명을 거슬러, 필시 너의 죽음을 더 가까이 하리라. 대비는 바랐다. 제 고성이 먼 날까지 기록됨을 바라고, 멀지 않은 날까지 패륜의 죄를 물을 것을 신들에게 바란 것이다. 실각하여 힘을 잃었으나, 차대의 자리에는 나를 포함한 서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를 영의정 한음이 함께 듣고 있었다. ― 네가 추국장에서 모든 신들을 앞에 두고 잊지 않겠다고 하던 그날은, 너의 바람과는 다른 이유로 잊히지 않는 역사가 되리라. 하여 너는 권욕에 눈이 멀어 이 나라 사직에 죄악을 가한 혼군이자 폭군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나는 대비가 이 마지막 말을 뱉었을 때, 예기가 된 비녀는 제 목이 아닌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으리라 짚어볼 수 있었다.
그날 차대로부터 달포쯤 지나 한음이 나를 찾아왔다. ― 이제 곧 향에도 가고, 주상이 사람도 주고. 이거 순 남는 장사 아니오. 게다가 시부 짓고 난을 칠 손 하나는 남아 있지 않소? 한음이 면전에서 농을 쳤다. ― 풍으로 월담하여 향에 놀러 가시니, 풍월을 담는 솜씨만 형은 늘어가겠습니다. 그의 말장난에 내가 크게 웃었다. ― 형은 그만 웃으시오. 그러다 남은 반신마저 휙 굳어 버리리다. ― 거, 이 사람 말하는 거하고는. 나의 몸이 더욱 통제되지 않자, 임금이 그를 먼저 헤아려 의관 하나를 붙여주었다. 의관은 나의 병이 풍이라 하였다. 반신이 무거워져 가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나의 향으로 잠시 돌아가 있기로 했다. 몸도 허락지 않고, 임금도 내게 사람을 주어 또한 허락지 않았다. 의관을 붙여주는 일로 임금이 뜻을 준 것이다. 그는 의관의 신분으로 무려 당상에 제수된 내의원 사람이었으니 이 일이 금세 궐내에 퍼졌다. 이제 임금은 하나의 일에 여러 뜻을 달리 주는 법을 아는 군왕이었다. ― 우리 오늘처럼 속없이 농을 주고받는 일은 참으로 오래되었네. 그렇지 않은가. ― 나라의 사정이 그러했으니……. 나와 한음은 사랑에 앉아, 탄이 종아이들 몇과 짐을 꾸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형은…… 대군의 죽음을 반대치 마시오. 이윽고 한음이 본래 찾아온 뜻을 내게 전하기 시작했다. ― 또한 나의 탄핵됨도 반대치 마시오. ― ……. ― 귀양도…… 나의 귀양도 반대치 마시오. 이번에는 길이 다른 듯하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한음이 내린 결정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음은 대군의 죽음을 막지 않음으로써, 임금을 막기로 한 것이었다. 임금이 온전한 하나로 서는 것은 결국 모든 자를 타자로 두는 일이다. 모두를 눌러 제 뒤에 따르게 하는 것은 외려 등 뒤를 살필 눈이 없는, 불온전한 하나로 남는 일이다. 하여 그 일을 행하는 데, 군왕이 발 딛고 하나로 서려하는 데 더 이상 패륜이 수단으로 쓰임되어선 안 되었다. 군왕의 길은 만인 앞에 떳떳해야 했으나, 이이첨의 술수와 임금의 패기가 그 길에 흠집을 내고만 것이다. 한음은 결국 그 길을 보수하기로 하였다. 하나의 패륜을 묵인하여, 이어질 또 다른 패륜을 막기로 한 것이다. 같은 왕족이고 같은 아들이나, 다른 배와 다른 세를 가졌으니 대군만은 겨우 간신히 정적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기록에서 그리 희석되고, 역사에서 그리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어른과 어미라는 이름은 경우가 다른 것이었다. 하여 한음은 대군의 죽음을 인정하고, 대비만은 살리려 한 것이다. 오랜 신하는 임금에게서 패륜이라는 원죄를 지우려 하였다. 한음은 결국 임금의 사람으로 남은 것이다. ― 이만 일어납니다. 형은 꼭 회복하고 돌아와…… 마땅히 살필 일을 살펴 주시오. 한음이 내게 대비를 맡겼으니, 나는 한음에게 궐을 맡기고 포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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