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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식개선칼럼]조현병과의 동행…희망의 18년 기록

최봉혁 | 기사입력 2025/05/03 [23:11]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윤서 지음, 한겨레 출판, 2025년 2월 출간.
이 칼럼은 2025년 4월 19일, 한국정신건강회복협회 (심지회) 월례회에서 진행된 강연을 토대로 작성됐다.

[장애인식개선칼럼]조현병과의 동행…희망의 18년 기록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윤서 지음, 한겨레 출판, 2025년 2월 출간.
이 칼럼은 2025년 4월 19일, 한국정신건강회복협회 (심지회) 월례회에서 진행된 강연을 토대로 작성됐다.

최봉혁 | 입력 : 2025/05/03 [23:11]

▲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윤서 지음, 한겨레 출판, 2025년 2월 출간  © 장애인인식개선신문

 

[장애인식개선칼럼] 최봉혁 칼럼니스트 

"조현병과 평화롭게 동거하는 것은 가능할까?"

2025년 4월 19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한국정신건강회복협회(회장 배점태) 심지회 월례회 강연에서 윤서 작가는 18년간 조현병 환자 자녀와 함께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는 단지 개인의 경험을 넘어,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국가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되짚는 계기였다.

진단은 시작이었다

윤서의 아들은 2008년, 만 12세의 나이에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환청, 망상, 인지 혼란, 까그라스 증후군 등이 급성으로 나타났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기까지 가족은 경찰을 부르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국내에 소아 조현병 사례는 드물었고, 치료 정보도 거의 없었다.

당시 투약한 클로자핀 600㎎은 부작용을 동반했고, 입퇴원이 반복됐다.
학교 시스템과의 마찰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윤서는 당시를 “오늘 하루를 버티는 것도 벅찼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사회가 만든 두 번째 고통

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이 회복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지적한다.
조현병은 치료보다도 편견이 더 두렵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실제로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의 고용률은 전체 평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윤서의 아들은 대학 졸업 후 바리스타, 자전거 정비사 등 7곳에 지원했으나 연속 탈락했다.
면접에서는 병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불안정해 보인다"는 이유로 고용되지 않았다.
장애는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이 사례를 통해 재확인된다.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

최근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회복 기반 접근법(recovery-oriented approach)’이 강조된다.
이 접근은 단지 증상 완화가 아닌, 개인의 자율성과 의미 있는 삶의 영위를 목표로 한다.

미국 국립정신질환연구소(NIMH)는 회복을 위한 5대 요소로 희망, 자기 결정, 연대, 목표 지향, 책임을 꼽는다.
희망은 그중 핵심이다.

2023년 국제학술지 IJERPH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회복을 경험한 조현병 환자 대부분은 “희망”을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언급했다.
가족의 지지, 작은 성공 경험, 낙인을 이겨낸 사례들은 회복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윤서는 매일 약을 '비타민'이라 부르며 복용 시간을 가족이 함께 지켰다.
일상 속 리듬을 만들고, 실패 경험을 분석하면서 복약 관리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가족이 환자의 삶을 ‘돌봄’이 아닌 '공존'으로 인식하는 전환이 회복을 도왔다.

 

가족의 역할, 제도는 얼마나 뒷받침하는가

2021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정신의학연구소는 가족 중심 중재가 조현병 환자의 재입원율을 30% 이상 줄인다고 발표했다.
가족은 치료 시스템의 외부 요인이 아니라, 핵심 참여자로 이해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신건강 시스템은 여전히 병원 중심, 약물 중심 구조에 머물러 있다.
윤서는 “치료는 병원에서 끝나지만, 회복은 집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정신건강복지법 개정 이후에도 지역사회 기반 회복지원 체계는 여전히 미흡하다.
치료 이후 환자가 복귀할 ‘안전한 생활 공간’이 없다면, 회복은 이론에 그친다.

 

교육과 고용, 낙인의 반복 구조

조현병 환자는 교육 단계부터 제도적 배제에 직면한다.
윤서의 아들은 중학교 특수학급에서 차별을 겪었고, 고등학교 진학은 거부당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입시와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정신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한계를 마주했다.

고용은 더욱 취약하다.
고용노동부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의 고용률은 25% 미만이며, 고용 유지율은 더 낮다.
이는 고용주와 사회의 인식 개선 없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세계은행(WB)은 2022년 보고서에서 "장애 포용 경제는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고 강조했다.
장애인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경제·문화적 주체로서 역할할 수 있는 존재다.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시선

윤서는 조현병을 통해 "삶의 본질을 다시 배웠다"고 말한다.
"성공보다 중요한 건, 오늘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라고 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감정을 들여다보며,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이 회복의 기반이 됐다.

또한 그는 “당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누구도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질환을 돌보는 모든 가족에게 해당되는 삶의 진리다.

 

- 조현병은 끝이 아닌 시작

조현병과의 평화로운 동거는 질문이 아니라 선택이다.
선택의 전제는 편견 없는 시선, 구조적 지원, 그리고 공존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정신질환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공공의 문제이자, 인권의 영역이다.

정신질환자와 그 가족에게 필요한 건 '이해'가 아니라 '연대'다.
더 많은 손이 필요하고,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전히 회복을 꿈꾸는 누군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포기가 아니라 희망이다.


참고문헌

  •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4). Ending stigma and discrimination in mental health.

  •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 (2023). Recovery After an Episode of Schizophrenia.

  • IJERPH (2023). Hopefulness and Recovery in Schizophrenia Patients: A Meta-analysis.

  • UBC Institute of Psychiatry (2021). Family-based interventions and relapse prevention.

  • World Bank (2022). Disability Inclusion and Economic Growth.

  • 고용노동부 (2023). 장애인고용통계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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